1. 감상 후 첫 느낌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의 영화라는 점. 점점 구조적인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경쟁자끼리 싸우는 영화가 많아지지 않았나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아마 구조적인 적(예를 들면 외국자본, 거대기업)과 싸우는 영화였으면 80-90년대 영화 같았다고 했을 수도.
이제부터 스포일러 또는 영화 내용 주의!!!
2. 갑자기 실직한 중년의 고민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는 꽤 감정이입 되었고 아마 우리 또래들도 그랬을 것 같은데,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음.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한 설득이 안되는 순간 영화가 마음에서 멀어질 것 같은 느낌.
3.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전부 거대한 저택에 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자라고 보기에도 좀 애매하고, 일할만큼 일한 관리자(전문가?)들이어서 관객들이 마음주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 나는 이게 실직한 사람들을 다루는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어서 색다르다고 느꼈고, 선과 악을 쉽게 가르지 않고 스펙트럼으로 다뤄서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좀 의아했던 건 사실.

4. 어쩔 수가 없어서 사람을 자르고, 어쩔 수가 없어서 집을 팔고 살림살이를 줄이고, 어쩔 수가 없어서 사람을 죽이고, 어쩔 수가 없어서 절도범 아들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어쩔 수가 없어서 AI가 운용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등, 당신들이 어쩔 수가 없다고 하는 일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일이냐고 반문하는 영화. 그런데 이렇게 누구에게나 정말 어쩔 수 없냐고 질문하면 어쩔 수 없어서 싸우는 사람들 기분이 좀 나쁘지 않을까?
5.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제목. 일단 <어쩔수가없다>라는 제목이 귀에 쏙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이 박찬욱 영화 거 뭐지? 그럴 리가 없다? 뭐 이런 소릴 함. <도끼>나 <모가지> 같이 강렬한 제목에,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과 다른 영화라고 했으면 오히려 관심이 훨씬 더 커지지 않았을까 싶은. (하지만 "모가지를 자른다"는 표현이 일본어 "首を切る (kubi o kiru)"에서 왔기 때문에 모가지는 어려웠을 수도? 그렇다면 밥줄? ㅎㅎ)
7. 연기상을 한 명만 줘야 한다면 염혜란. 연극배우 역할에 판을 잘 깔아주니까 혼자 마음껏 날아다니시는 느낌. 생애 첫 베드신 어쩌고 기사를 본 것 같은데, 15금 만드시느라 다 잘라낸 듯?

8. 정서경 작가가 빠지고 이경미 감독이 들어와서 그런지, 분명 뭔가가 좀 바뀐 느낌. 손예진의 캐릭터가 이해될 듯하면서도 잘 이해되지 않다가 <비밀은 없다> 생각을 하니까 약간 이해가 될 것 같기도. 적당히 오버스러우면서도 불륜인듯 불륜아닌 의뭉스러운 연기를 잘 소화한 느낌.
9. 이성민을 죽일 때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차승원을 죽일 때 산울림의 <그래 걷자>, 박희순을 죽일 때(죽이기 전에?) 잘 모르는 트로트곡이 삽입곡으로 나옴. 고추잠자리가 나올 땐 박찬욱 감독의 최고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김광석 노래를 썼을 때 생각이 났더라는.
10. 박찬욱 감독 팬들과 평론가들이 이건 박찬욱표 영화와 달라, 순한 맛이야, 기괴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그의 영화를 더 많이 보게 하고 흥행도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투명한 욕망이 보여서 살짝 웃음. 미안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 흥행의 문제는 폭력성이나 기괴함(?)이 아니라 "대중적 취향과 적당함"의 문제라는 것을 잘 모르시는 듯. 여기서 "적당함"이란, 한마디로 스크리너로 영화 보지 않고, 또는 극장에서 두 번 세 번 보지 않고 알아먹을 수 있는 적당함. 씨네필들과 평론가들이 "뻔하다"고 하는 그 적당함. 대중의 취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그 적당함에서 살짝 위로 올라가 있고 이번에도 비슷하다는 생각.
11. 예전에 "박찬욱은 지적유희의 끝판왕"이라는 평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빈티지 진공관 앰프(?)가 나오고, 퇴근 후 한 잔 하는 위스키 바가 나오고, 뭔가 생뚱맞은 저택들이 나왔는데, 하도 많이 회자가 되어서인지 벽지는 특별하게 기억이 나지 않음.


12. 벽지 사진 찾다가 이성민네 집 천장을 봤는데 이번엔 천장이군, 생각이 들었다는...ㅎㅎ (영화볼 때는 몰랐음)

13. 면접을 볼 때와 그 이후에 빛이 계속 얼굴에 비춰서 피하고 힘들어하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굳이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했는지 궁금.
14. 딸의 이야기도 뭔가 힌트도 없이 질문거리만 던져놓고 끝내서 궁금.
15. 지난 번 <헤어질 결심> 카발란도 그렇고, <어쩔수가 없다> 스프링뱅크도 그렇고, 국내 마케팅 열심히 하는 협찬주만 쓰시는 거 아닌가 싶기도 (그런데 위스키 전문가가 스프링뱅크 마케팅 안한다고 함). 박찬욱 감독의 위스키 취향은 좀 다를 것 같은데, 원고를 쓸 때 위스키를 정해서 쓰고 협찬을 받는 건지, 아닌지 궁금.
16. 제지 회사 이름 "문제지"로 지은 사람 박찬욱 감독님인지 궁금. 그럼 장단음 확실히 해서 "무운 제지"라고 발음하든지 했어야. 뭔가 실패한 아재개그 느낌. 거기에 더해 이번 영화를 박찬욱표 웃음 코드가 아닌 보편적인 웃음을 주는 영화라고들 하던데, 미안하지만 내가 본 극장에선 몇몇 사람들만 낄낄거리고 사람들이 거의 웃지 않음. 왜냐하면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 이미 사람들 머릿속이 복잡한데, 거기서 문제지니 넷플릭스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준비가 안된 상태였나 싶기도. (극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17. 오달수, 유연석에 랜치로 이빨 뽑는 장면은 <올드 보이>를 연상시킴.
18. 마지막에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게 바친다고 자막이 떠서 그 의미가 궁금했는데,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님이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라는 영화가 있었다고. 어떻게든 찾아서 보고 싶은데, 대신 나는 감독님 싸인을 갖고 있는 사람.

19. 마지막 궁금증. 영화의 리메이크야 흔한 일인데,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감독상, 베를린 황금곰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등을 휩쓴 거장의 작품을, 박찬욱 같은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감독상 등등을 받은 거장이 리메이크한 적이 있었나?
20. 박찬욱에게 봉준호는 금기어라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기생충>이야기를 했음. 같은 계급끼리 싸우는 이야기, 그 싸우는 장면에서 음소거에 배경음악 깔리고 엎치락 뒤치락 난장판되는 장면까지, 연상이 되지 않는다면 이상할 지경. 하지만 이야기에 대한 태도와 결론은 상반된다는 생각. 딱 봉준호스럽고 딱 박찬욱스럽게.
21. 결론적으로 여전히 박찬욱식 인장은 확실한데, 어쩐지 살짝 박찬욱스럽지 않은 느낌이 뭔가 낯설지만 새로운 느낌. 역시 한 번 더 보면 좋을 영화인데, 마음 편하게 한 번 더 볼 수 있는 영화.
(사족) 토론토영화제 관객상 받으면 아카데미 수상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오스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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