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다.

 작가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다.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작품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의 전자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통신 수단 광고가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운동과 스포츠는 과학만능주의를 선언한 지 오래다. 예술 문화 부분만 그러한가. 인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문학도 인문'과학'으로 과학에 스스로 흡수통합되어 버렸다. 사회과학, 교육과학, 생활과학 등등, 이제 '과학'은 모든 학문에 붙는 공통적인 접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국가에 경제위기가 닥쳐오니 모두가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어려운 경제위기를 풀기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하고 결국 외화획득에는 신기술에 의한 수출 증대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고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특혜'까지 주어가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낱말을 머리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대중들과 가깝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을 요약해서 인류 역사책에 한 줄로 적는다면 아마 복제양 '돌리'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조그만 양 한 마리가 사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된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우리귀에 들렸다. 하지만 '돌리'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에 왔던가.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수정란 분할 방법으로 복제 개구리(1952년), 복제 생쥐(1983년), 복제 송아지(1990년)를 만들어낸 전력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복제 기술의 발달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가. 그리고 어느 날 나타난 어린 양 '돌리'에게 경악하고 또한 박수를 보내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문화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의식과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주는가. 바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 매체(媒體, media)다.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리'는 전세계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양이 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대중 매체의 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각 종 대중 매체의 발전을 급속하게 촉진시켰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책에서 언론과 방송으로,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중 매체의 발달은, 금속활자가 위대한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쇄기구, 통신 장비등의 발달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이렇게 과학기술에 빚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서 과학기술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학술지를 통해 인정받고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학술지에 쓰이는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때문에 해석이 필요해졌다. 대중 매체가 바로 여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과학기술의 보도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정확한 사실 보도의 부재와 전망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이다.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외국 언론의 무분별한 인용보도와 전문학술지를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년 전만 해도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DHEA(dihydroepiandrosteron)의 경우가 그렇다. 96년 말 <뉴스위크>의 보도를 계기로 갑자기 불어온 DHEA는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으로,여성에서는 에스트로젠(esterogen)으로 바뀌는 전구물질(precursor)로서 몸안을 순환하는 가장 흔한 스테로이드 물질인데, 당시 한동안 정력제에서부터 항노화제, 항암제,심지어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1월 7일 프랑스 유력 시사주간지인 '르 포엥'에서 프랑스국립보건연구소 에티엔느 에밀 볼리외 교수팀에 의해 DHEA의 효능이 밝혀졌음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바 있다. 결국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과학기술 보도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학술 논문은 자신의 가설과 그것을 입증하는 결과들(results)로 나타난다. 때문에 이 결과들을 통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논문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비전공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있다. 논문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한채 몇몇 단어를 직역하다보면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지껏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는 항암제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 실험이 생체(in vivo) 실험인지 체외(in vitro) 실험인지, 사람 대상인지 쥐나 토끼의 대상실험인지, 전임상단계의 결과인지 임상 몇 상의 결과인지 등등, 오히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은 다 생략되거나 간단하게 압축하고 '획기적 치료제 개발'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등의 행태는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보도에 있어서는 정확한 사실의 보도와 조심스런 전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대중에게 꼭 과학기술을 알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기술관료(technocrat)'의 시대가 도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 간접적인 영행을 주고 있는 판국에, 사실상 대중들은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분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은 '전문가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대중화'를 통한 과학기술문화의 확립이다.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열린 전문가 집단으로, 소수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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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보다.

김민기를 아는가. 그는 내 청소년기의 우상이었으며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중학교 2학년 음악시간에 내 친구가 그의 노래 <친구>를 부르다 선생님께 한쪽다리를 들고 의자들고 앞으로 나란히하는 高難易度의 벌을 받은 후 부터 그는 나에게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음악평론가인 김창남 선생이 엮은, 한울에서 나온 <김민기>라는 책을 보고 그의 노래를 거의 다 마스터해 버렸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미대생이었던 그가 해질녁 어촌의 고깃배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자 그 옆에 있던 여공 하나가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소아 붙이자 스스로 '아직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일화는 아직도 내 가슴 속 깊이 남아있다.

그러나 김민기의 위대함은 오히려 다른 데 있다. 적어도 김민기는 70년대의 우상이며 신화였다. 하지만 모든 우상은 깨어지게 마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예를 보아 왔던가. 한 때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의 화려한(?) 변신과 변절(뭐, 꼭 그렇게 보는 시각이 항상 옳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 말이다. 89년, 그러니까 군사정권에서 민간정부로의 이양기(6공 시절)에 모든 노래들이 해금되기 시작했고 그의 노래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길에서 파는 나쁜 음질의 <금지곡>테이프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듣는 김민기 특유의 낮은 음성. 아, 그것은 전율이었다.

그는 충분히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숨어버렸다. 공명심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신화가 깨어지는 두려움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비참한 시대가 한 평범한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만들었고 <개똥이>, <지하철 1호선>등, 조금 다른(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충실한 삶을살고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을 보고 가장 기뻤던 사실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다.

<지하철 1호선>은 참 좋은, 그리고 여운이 남는 뮤지컬이었다. 10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수 십명의 역할을 하면서도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극의 흐름을 무리없이 끌고 갔다. 게다가 원작이 독일의 것임에도 마치 우리극인 것처럼 각색해낸 능력도 높이 살 일이다. 지하철에 얽힌 온갖 인간들의 모습속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 비관적이지도, 그렇다고 전혀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냥 우리의 모습이다. 보통 뮤지컬하면 <아가씨와 건달들>이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을 떠올리고 요즘에는 탈렌트들이 나오는 <넌센스>등이 인기를 끌지만 이런 공연이 몇 년간이나 장기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자랑스럽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김지하 작시의 <금관의 예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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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이번 서부지구 겨울 수양회 선택강좌를 위해 참고했던 책들이다. 항상 강의라는 것은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특히 주제가 "캠퍼스 리더십"이라는,내가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열심이 생겼었다. 그러나 사실 여러 책을 대하면서 적잖이 실망한 경우도 많았음을 고백해야 겠다.  

* 1.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지음, 김영사
* 2. 차범근식 리더십을 배우자, 김광열 지음, 보성출판사
* 3. 예수의 오메가 리더십, 로리 벤스 죤스 지음, 한언
* 4. 열매맺는 지도자, 죤 맥스웰 지음, 두란노
* 5. 비전있는 지도자 비전있는 사역, 죠지 바나 지음, 죠이선교회
 6. 불가능은 없다, 로버트 슐러 지음, 지성문화사
* 7. 오늘을 위한 성경적 리더십, 추아 위 히안 지음, IVP
 8. 탁월한 지도력, 존 화이트 지음, IVP
 9. 청년 신앙 조국, 김진홍 지음, 두레시대
10.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프랑스와 까르뗄 지음, 한국장로교출판사
11. 이스라엘 역사, 정승호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12. 제자도, 데이빗 왓슨, 두란노
13. 한국기독청년학생운동사, 김영철 지음, IVP
14.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 김진홍 지음, 두레시대
15. 그리스도인의 비전, 리처드 미들톤 & 브라이언 왈쉬 지음, IVP
16. 복음전도 구원 사회정의, 로널드 사이더 & 르네 빠리야 지음, IVP
17.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박재순, 천지
18. 소그룹운동과 교회성장, 론 니콜라스 외 함께 지음, IVP  
*19. 리더와 보스, 홍사중 지음, 사계절
20. 신사고이론 20, 이면우 지음, 삶과 꿈
21. W이론을 만들자, 이면우 지음, 삶과 꿈
*22. 리더십은 예술이다, 맥스 드프리 지음, 한세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일반적인 리더십의 핵심은 'Vision'과 '인간관계'와 '적극적 사고'이다. 이런 리더십의 덕목들은 훌륭한 지도자에게 필수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지나치게 "성공"이라는 측면에 초점지워져 있다. 성경이 증거하는 리더십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과 인간의 중심에 있다. 리더십은 결코 테크닉이 아니라 삶의 자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역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개개인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도 하나의 비전에 합하여지는 '창조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최고의 사역이며 헌신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혼자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창조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책 이야기를 좀 하자면, 리더십에 관련된 책 중 60% 가까이는 기독교 서적이다. 그런데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가 적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은 소위 경영, 처세에 관한 것이다(그렇다면 기독교는 자본주의적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일까?). 이 20권 중에서 새로 사서 읽은 책은 모두 8권(번호 앞에 *표시 된 것들). 그 중에서 가장 좋았던 책은 역시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었다. 왜 몇 년 동안 그렇게 이 책이 소위 젊은 청년 기독인들에 권하여 졌는지 알 수 있었다. 테크닉이 아닌 품성을 가르쳐주는 글이다. 최악은 <차범근식 리더십을 배우자>. 이 책은 다른 책들의 100% 표절이며 짜집기다(으~ 짜증). 재미있기로는 홍사중 선생의 <리더와 보스>. 갖가지 예화가 상식을 넓혀 주면서도 신문 사설가 답게 글이 쉽다. 전에 CLT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내가 참고문헌을 많이 다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내가 하는 말에 대한 근거를 대고 싶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싶기 때문이고, 셋째는 더 깊은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고 마지막으로는 '공돌이'라는 한계 때문에 생긴 내 지식의 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강의는 오히려 내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시간을 잘 못 맞춰서 할 말을 다 못하고 쓸데 없이 내 경험 사례의 인용을 남발한 것에 대해두고두고 후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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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민음사)를 읽다.

1. 몇 가지 쓸데 없는 이야기.
  - 전에 <선택>을 읽고나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내가 대학 1학년 때, 우리과 어느 선배가 내게 물었었다. 누구 책을 좋아하냐고. 그래서 그냥 무심코 "이문열..."이라고 말했던 내게 선배가 들려준 한 마디는 "이문열 그런 새끼는 죽여버려야 되는데..."라는 말이었고 그건 내게 '운동권'에 대한 하나의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그 선배의 말이 왜 그리 과격했는지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 재작년 나의 큰 사건 중 하나는 바로 <태백산맥> 전 10권을 '뗀'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의 바로 첫 일성(一聲)이 "이젠 <영웅시대>를 읽어야 겠다."는 것이었고 보면 참 오랜 시간이 그 가운데 가로 놓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태백산맥>의 경우 '한길사'에서 '해냄'으로 넘어가면서 구판을 반 가격(권당 3천원)에 샀었는데, 이번에도 [나귀]의 좋은 가르침에 따라 교보문고 재고도서 판매대에서 역시 같은 값에 구입을 했다. 이런 즐거운 일이...

2. 이문열에 대하여
  이문열. 그 이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게 있어서 그는,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적당히 문학적인, 하지만 결코 무시되지도 않고, 무시되어서도 않되는 그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그는 이 시대의 '大家'이다. 문학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적어도 우리에게 주는 그의 영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나오는 신출내기 평론가들이 하나같이 이문열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일종의 "뛰어넘기" 기술이고 그만큼 상업적인 전술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이 시대가 원하는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에 깊은 애정을 보여오지 않았는가. 결국 그는 한국사회의 논쟁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소위 '진보와 보수'(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논의를 무척 싫어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의 시대에 말이다.

3. <영웅시대>와 <태백산맥>
  두 소설 모두 좌파 주인공이 나온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 시대 소위 지식인이나 생각있는 사람들은 결국 좌파를 지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태백산맥>의 김범우 조차도 결국 인민군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영웅시대>에는 영웅이 없다. 반면 <태백산맥>에는 정말 많은 영웅이 나온다. <영웅시대>에는 이런 저런 얼치기들이 등장하고 <태백산맥>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물론 지나치게 미화되기도 하지만, 결국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태백산맥>의 완성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고 이에 비해 <영웅시대>는 소설적 성취가 너무 형편없이 떨어진다. 특히 뒤로 갈수록 주인공의 관념적인 갈등과 소위 '동영의 노트' 형식의 글은 그야말로 '역겨운' 사족일뿐이다. 이문열은 전혀 대가 답지않고, 사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쓸데 없는 독백으로 읽는이들을 훈계한다. 이는 거의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 수준, 또는 그 이하이다. 마치 최근의 <선택>에서 처럼 말이다.

  한 사람의 행동은 얼마만큼 사회적이고 또한 얼마만큼 개인적인가. 이를 측량할 수 있는 기계가 없는 이상 수치를 댈 수도 없고, 이런 구분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 들지만 역사의 왼편에서는 사회적 행동이, 그 반대편에서는 개인적 행동이 우세해 왔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된다는 것이 사회학의 분야라면 인간은 잠재된 무언가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심리학의 분야일 것이다. 하여튼 <영웅시대>의 관점은 극히 사회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너무 개인적인 얘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큰 반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개연성 부족은 결정적인 흠을 갖고 마는데 결국 어설프기 그지 없는 결말은 필수적이다. 동영의 어머니의 성격이 갑작스럽게 바뀌고, 사투리를 쓰다가 말다가 하고, 안나타샤의 등장과 만남의 우연, 김철이 죽으며 남긴 어떤 여자의 처리 등등 흠잡을 데가 한두군데가 아니다. 결국은 이런 것들이 <영웅시대>를 관념적인 소설로, 이문열을 "죽여버려야 하는" 인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닐까.

  전쟁이란 역사는 이성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 속을 빠져나와 이 땅을 살아가신 모든 우리 민족의 선배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덧붙임] <영웅시대>에 나오는 기독교는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을 담는데 너무 부족하다. 정인이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은 개연성은 있지만 왠지 답답함을 준다. 그러나 사실 누가 믿음을 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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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접속>을 보다.

1. <접속>을 보기 전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안좋은 편견을 갖고 있었다. 아니 이 영화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컴퓨터 통신에 대한, 또는 과학 기술에 대한 내 뿌리 깊은 불신이 그것이었다. "컴퓨터 통신을 소재로한 외로운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 이것이 <접속>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몇 몇 평론가들이 90년대 최고의 어쩌고 하는 평을 보고서 지루한 영화일 것이라는 지레 짐작을 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2. <접속>을 보면서

  <접속>의 최대 미덕은 언어의 절제에 있다. 절제된 언어 속에서 나는 마음껏 생각의 자유를 누렸다. 충분히 생각할 여유를 주는 영화. 그런 영화가 주는 매력이 있다. <접속>은 그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관객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것. 여운이 남는 영화. 이것이 좋은 영화에 따르는 조건이다. <접속>의 마지막 장면은 일반 영화와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적' 이었다.

3. <접속>을 보고서

  <접속>은 컴퓨터 통신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다. <접속>의 영어제목은 "로그인"이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의견은 잘못이었다. 차라리 우리나라 제목이 "만남"이어야 하지 않을까. <접속>에서 통신은 하나의 수단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통신이 주는 폐해, 그 익명성에 따르는 무책임, 비인간성 등등 통신에 대한 온갖 욕설을 늘어놓으려던 나의 계획은 나의 멍청함으로 허무하게 끝났다.

  한석규는 6년 전에 헤어진 한 여인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하던 전도연은 그가 자신이 언젠가는 만난다고 믿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이 두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뻔하지만 결국 명혜(? 한석규 옛 여인)의 죽음으로 또 엇갈리게 된다. 계속 엇갈리는 만남 속에서 영화의 대사처럼 "꼭 만나야할 사람은 과연 만나는가?"의 질문이 필요해진다. 이 긴장이 영화를 지탱하는 하나의 힘이다(물론 이미 많은 사람들은 그  둘이 만나는 것을 알고 보았다).

  언뜻보면 무척 상투적으로 보이는 내용 속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삶에 대한 따뜻한 애착이었다. 과거에 속에서 사는 남자와 거짓된 꿈에 젖어 있는 여자, 그 두사람이 어떻게 삶의 제자리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감독의 시선은 지극히 따뜻했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만난다!(아마 그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둘의 만남은 정말 중요한데, 마치 부버의 표현대로 "나와 그것"의 관계가 "나와 너"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맨 마지막에도 그 둘이 스쳐지나갔다면? 어쩌면 그랬다면 이 영화는 도시인의 우울함과 쓸쓸함만을 보여주었을 지도 모른다. 과거에 사로잡힌 한 남자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의 이야기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만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존재로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연은 한석규의 도피증(?)을 굴복시켰고 한석규는 전도연에게 그가 갖고있는 꿈(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 버리지 말 것을 가르쳐줬다. 그러나 아직도 한석규가 사랑하던 여자는 이 세상에 없고 전도연의 사랑은 친구에게 있다. 그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새로운 힘이 생겼을 것이다. 그게 인생의 작은 비젼이고 꿈이 아닐까?

  한석규의 연기는 매우 깔끔했다. 역시 그에게 <서울의 달>이나 <넘버 3>의 건달 역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비록 <초록물고기>로 (그 망할)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어느 영화로 받았어도 무난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전도연의 연기도 예상 외로 탄탄했다는 느낌이다. 연기에 있어서 눈빛이 살아있는 것은 보는 이로서도 즐거운 일이다. 깔끔한 색채와 소품, 긴 호흡 속에 숨어 있는 짧은 대사등 장점이 꽤있지만, 무엇보다 감독의 연출력이 두드러져 보인다. 여백... 과연 기성 감독들이 이렇게 여백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좋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 게다가 우리 영화를!
<초록물고기>와 함께 감히 올해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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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이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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