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렬님, 안녕하신지요. 오늘 아침 어느 신문보도를 보니 모 구단에서 지도자수업을 하신다고 하더군요. 이제 그라운드에서 다시 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올 해 야구 안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지난 30일 신문을 보면서 저는 정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님께 펜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님이 작년에 귀국하셨을 적에 제가 님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마 통신상에 올린 글을 [팬들의 선물] 집행부 여러분들이 전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건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지난 30일 한겨레신문의 스포츠면의 헤드라인은 바로 체육인 290명 “선수협 지지”라는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이제 드디어 선수, 팬, 사회단체에 이어 체육인들까지 나섰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현재의 야구판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는(또는 적은), 분들의 이름이 대부분이더군요.


그 분들의 지지성명을 결코 폄하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야구판에 몸담은 많은 야구인들은 구단의 눈치만 보고 있다는 아쉬움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그 곳에 님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조선일보의 스포츠면(선수협 지지성명 기사는 물론 없었지만)의 한 귀퉁이에 실린 님의 기사([스포츠 단신]선동열 KBO위원 군부대 위문)를 보고는 꼭 한 말씀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추위에 고생하는 군 장병들을 위문하신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KBO 사무총장과 나란히 위문품을 놓고 악수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보다는, 같은 날 있었던 선수협 지지성명서에서 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저만의 욕심일까요.    


선동렬님. 님은 정말 우리의 국보였습니다. '선동렬 방어율 학점'이라는 말 아시죠? 그 한 마디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분단 사실도 모르는 어느 일본인이 님의 이름만은 알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그만큼 님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님이 한국 야구의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님께서 구단과 KBO의 횡포를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님이 주니치에 갈 때, 얼마나 방해가 심했습니까. 아예 처음에는 님을 주저앉혔습니다. 구단과 KBO는 한국 야구 금방 망할 것처럼 굴었었죠. 두 번재 님이 일본진출을 선언했을 때, 팬들만은 아낌없이 님의 해외진출을 팍팍 밀어드렸답니다. 결국은 팬들에게 구단이 졌지요. 하지만 한국 야구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단은 임대라는 희한한 방식으로 돈 빼먹고 권리 행사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고 결국은 님을 은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일본 최고의 소방수 다이마진 사사끼가 시애틀에 가서 작년에 신인상을 탔습니다. 만약 님께서 같은 나이였다면 사사끼 정도는 쉽게 제칠 수 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니, 실례가 될 지 모르지만 박찬호 선수보다도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님의 후배들이 그 부당함을 조금이나마 고치고, 야구 한번 신바람나게 해보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이 돈 많이 받으려고 그런다구요? 이미 그들은 충분히 받고 있고 선수협 안하고 못이기는 척 회유에 넘어가 주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선수들입니다. 그들의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다구요? 아마 평균 93%의 지지를 보내는 국민들이 모두 불순세력인가 봅니다. 선수협을 인정하면 프로야구 망한다구요? 구단들은 셈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죠. 그리고 이건 거의 협박입니다. 너무 궁색한 변명들 아닙니까.  


님께서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현역 때 선수협이 생겼으면 분명히 말하지만 저도 선수협에 가입했을 겁니다."라고 하셨더군요.그런데 그 날 님은 KBO 사무국장과 군부대 위문을 가셔야 했습니까? KBO 홍보대사라는 직함 때문입니까? 그 직함이 님의 30년 야구인생보다 중요합니까?


우리 팬들은 마운드에서 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당당한 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님은 바로 우리의 '국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라는 말로 그 답을 피하시렵니까. 아니면 우리의 국보 선동렬마저도 KBO와 구단에게 찍히면 지도자 한 번 못해보고 야구계를 떠나야하기 때문입니까.  


지난 99년 주니치 드래곤스의 우승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해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우리 '주니치 3총사' 덕분에 쉽게 이겨냈습니다.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당시 홈련왕 페타지니를 2루수 뜬공으로 잡고 환호하는 님의 모습은 비디오로 잘 간직되어 있고 또한 앞으로도 잘 간직할 생각입니다. 선동렬님, 그렇게 언제나 자랑스럽게 우리의 곁에 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색한 기념촬영 사진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자리에서 님을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훗날 녹색의 그라운드에서 만나면 더욱 좋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Posted by 바이오매니아
먼저 대학 신입생들에게 주었던 한겨레신문의 철지난 옛 기사 하나를 읽어 보자. 제목은 "[책과 사람] 서점 대표들의 한마디." 내용은 몇몇 대학교 앞의 소위 "사회과학 책방" 주인들이 대학 신입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의 김동윤 대표의 이야기를 잠깐 인용하고 싶다. "[그날이 오면]에서 지난 시기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단연 <전태일 평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선물로 사주거나 새내기 배움터에서 단체선물로 구입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눈에 띄게 그런 현상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80년대 밤새 눈물로 책장을 적시게 했던 이 책이 벌써 자신의 생명을 다한 걸까요?"

그렇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2000년 11월 13일은, 바로 그 책의 주인공 전태일의 30주기 기념일이다. 그러나 그 뜻깊은 날에 나는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바로 새 천년의 11월을 끝으로 신촌의 사회과학 책방 [오늘의 책]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오늘의 책]이 그저 하나의 작은 책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대학과 대학가는 변화하는 시대와 자본의 침식으로 충분히 상업화되었고, 또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임이 분명한 지금, 경쟁력없는 일개 작은 책방의 폐점은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더욱이 최근 인터넷 서점들과 시중 서점들과의 첨예한 대결(?)의 양상을 보이는 시대에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 종합대학만 5개가 있는, 그러나 하루 유동인구 33만에, 여관 1백32곳, 카페 2백82곳, 유흥시설 4백8곳인(그나마 이것도 92년 통계이니 지금은 더 많을 것이다) 신촌에, 몇 개 되지도 않는 서점 중의 하나가 [오늘의 책]이었다. 이미 예전에 사라져버린 [알 서점]에 이어 이제 [오늘의 책] 마저 생존을 포기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감상이나 신파적인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본디 [오늘의 책]이 있던 자리는 신촌 전철역과 연세대학을 잇는 연세로의 한가운데였으나 지난 96년 임대료 인상 문제로 문을 닫을 위기를 맞았었다. 그러자 주변 대학인들 및 동문들, 그리고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늘의 책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고 거기에 호응한 많은 사람들의 정성으로 현재의 건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 이후 책방을 조합형태로 운영하고 지하의 '열린 공간'을 대학생들이나 작은 소모임들에게 모임 장소로 빌려주는 등, '문화공간'으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갖춰 오늘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대학가는 젊은이 놀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밝혀진 터. 영구불멸할 듯이 보이던 단골 당구장들마저 PC방, 게임방으로 바뀌는 디지털 혁명 속에 일개 작은 서점, 그것도 '골치아픈' 책이나 파는 사회과학 서점들이 살아 남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현재 [오늘의 책] 총무인 윤진희씨는 "내년 건물 재계약을 앞두고 경영 악화로 인해 지난 10월 28일 조합원 총회에서 폐점이 결정되었다"고 폐점의 경위를 설명하고, "다른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 서점들도 모두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지만 버티고 있는 실정일 것"이라고 현재의 실정을 말한다.

'책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시조라는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구텐베르크여 안녕'이라고 일갈한 것이 36년 전이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까지 인쇄 매체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결코 그 세력을 지켜 왔다. 그러므로 일단은 맥루한의 이야기가 틀렸고, '책의 불멸'을 이야기한 움베르토 에코의 손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맥루한에 이은 새로운 도전자가 나왔으니 그는 <디지털이다>의 저자 네그로폰테이다. 그는 2020년이면 종이로 만든 책은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생존 경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책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데도 불구하고, 책방들은 이제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많은 선배들의 손때와 발길이 닿았던,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몇 시간 정도는 쉽게 책임져 주었던, 수많은 친구들 또는 연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때로는 구하기 어려운 금서들의 보급 통로였던, 또한 온갖 '현장'들의 소식지를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소통시켜 주었던, 그 책방들이 말이다. 이제 나는 진한 아쉬움으로, '님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진부한 싯귀를 지난 시대에 바치며 이 기사를 맺고자 한다. 잘 가라, [오늘의 책], 내 십이년지기 친구야...


Posted by 바이오매니아
24일 오후11시에 있었던 2000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과 이라크의 준준결승은 축구를 보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준 한판이었다. 경기는 일본의 4-1 대승으로 끝났다. 결국 일본과 중국, 한국과 사우디의 4강 대결로 압축이 되었다. 중동팀의 부진과 극동팀의 약진이 두드러진 대회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화제는 일본 축구의 약진일 것이다.

지난 달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후반 종료 직전 어설픈 페널티킥으로 동점,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일본 축구의 영웅 나카타 히데토시 (23, AS.로마)의 실축으로 4강행이 좌절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회를 통해 일본 축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단 한차례 월드컵 출전에 3전 전패, 승점 0, 득점 1, 한국전 역대전적 11승 14무 42패(90년 이후 5승 3무 7패) 이라는 기록들은 이제 장롱 속에나 넣어야 할 듯하다. 어제 이라크와의 준준결승 경기 전까지 일본은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이겨본 경험이 없었다 (역대전적 2무 2패).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93년 10월에 있었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후반 종료 28초 전에 터진 동점골로 일본으로 하여금 사상 첫 월드컵진출의 좌절을 맛보게 한 팀이 바로 이라크였다. 그러나 어제의 경기는 일본 축구가 이제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흔히들 일본 축구의 고질병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커의 부재의 극복이나 개인기와 전술 능력 발전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본 축구에 대한 투자, J-리그의 활성화, 외국인감독 영입으로 인한 선진기술 획득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모두 사실이다. 그 외에 일본 축구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두터운 선수층. J-리그 1부에만 16개 팀, 2부에도 11개 팀이 있다. 거기서 엄선된 선수들이기에 선수층이 두터운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스타 플레이어도 많다. 사령관 (일본에서 게임 메이커를 일컫는 말이다) 나카타가 빠진 자리에는 또 하나의 걸출한 미드 필더 나까무라 슌스케(22, 요꼬하마 마리노스)가 있다. 한국 팬들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선수이지만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만 하는 선수임에 틀림없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공격은 거의 나까무라의 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1년만에 돌아온 나나미 히로시(28, 이와타 쥬빌로)와 작년에 당한 큰 부상에서 회복되어 교체멤버로 활약하는 오노 신지(21, 우라와 렛즈)도 있다. 이렇게 중원이 튼튼한데다, 지난 올림픽에서 급성장한 다까하라 나오히로 (21, 이와타 쥬빌로)와 니시자와 아끼노리 (24, 세레소 오사카)가 최전방에서 골을 노린다. 올림픽 예선 당시 숙소를 이탈해서 연예인과 데이트한 죄(?)로 잠시 감독의 눈 밖에 났던 교체 멤버 야나기사와 아쯔시 (24, 가시마 안토라즈)도 뛰어난 공격수이다. 이 외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비진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대 교체. 미우라 카즈로 대표되던 일본 축구 중흥의 1세대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나나미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조 쇼지 등을 1세대의 끝자리에 넣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세대교체의 주역은 역시 축구 영웅 나까타 히데토시. 사실 현재 일본 대표의 주축들과 나이차이가 없지만 그는 1.5세대로 불려질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출현은 일본 축구의 붐을 몰고 왔으며, 일본 선수로서 세계 축구 최고 리그라는 세리에 A에 진출, 심지어 그의 어록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그는 동세대 젊은 일본 대표들과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한다. 그 이후로 나타난 오노, 야나기사와, 나까무라, 히라세 등등의 선수들이 바로 현재의 일본 대표선수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본 축구에는 악재도 있다. 몇 년 전부터 J-리그의 몇몇 팀들의 재정 사정이 나빠져 매각을 결정하거나 지방 자치단체에 떼어 넘기려고 하기도 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으로 데려왔던 초창기의 유명 외국 선수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올림픽 출장 후 나카타가 이번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가버렸다. 트루시에 감독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경질설, 사임설 등에 연일 시달린다. 며칠 전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는 근본적으로 스타일이 바뀌었다. 이제 그 심연을 조금 들여다보자.


그 심연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젊은 선수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 (나카타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나올 때 딴 짓 하는 모습을 보라). 즐기면서 축구를 한다.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국내 경기건 국제경기건 일본 축구의 특징을 꼽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나친 승부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에게 큰 부상이 많지 않다.


또한 자유롭게 개인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개인기의 부족은 개인기를 연마하는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측면보다 그것을 써먹을 기회의 부족이 더 문제다. 개인기로 돌파해봐야 붙잡히거나 걸려 넘어지는 축구에서 누가 돌파를 시도하겠는가. 승부만이 지상과제인 축구에서는 개인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수비 선수들에게 공을 차는 기술보다 상대 주공격수를 따라다닐 수 있는 끈질긴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력과 체력의 부족, 혹자는 이것이 일본 축구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닐까. 경기는 실력으로 이겨야한다. 예전 어느 축구 해설자는 '좀 거칠게 다뤄서 겁을 줘야 된다'는 말을 거침없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력으로 하는 축구가 아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일본은 예선 리그 동안 단 2장의 옐로우 카드를 받았을 뿐이다 (이라크와의 준준결승에서 2장을 받았지만...). 나카타는 상대의 거친 수비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트루시에 감독이 대 이라크전에 앞선 인터뷰에서 한 말, "필요하다면 일본도 거친 경기를 할 수 있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부담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 이것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축구에 대한 지원과 여건 만들기는 결코 자본의 투입만으로 끝이 아니다. 자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가대표선수들이지만 나는 때로 그들이 불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재미있는 축구를 보기 위한 응원이 아닌, 자아도취적인 승리를 위한 부담만을 안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오는 26일, 예선에서 일본이 4대1로 이겼던 사우디와 우리와의 준결승이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또 한번의 한일전을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정말 멋진 경기, 깨끗한 경기, 그리고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서 승패를 떠나 박수를 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승리를 거둔다면 금상에 첨화하는 격이지만 말이다.
Posted by 바이오매니아
올해 최고의 문제작 하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오래된 정원>. 책 선전을 겸해서 있었던 5.18 즈음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그리고 동인문학상 후보작 선정 거부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이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자 까뮈의 대부(?) 김화영 선생은, 황석영 선생의 선정 거부 선언 후에도 줄기차게 이 책을 추천했다. 그러고 보면 그럴 것도 같다. 예전 김화영 선생의 글에서 드러나는 그 화려하면서도 실제적인 묘사를 닮아보였으니까 말이다.

황석영 선생의 책을 읽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무기의 그늘>, <객지> 정도가 아닐까? 사실 황석영식 글쓰기가 어땠는지 잘 기억 나진 않지만, 이 책 <오래된 정원>은 상당히 독특한 느낌이다. 소위 '황구라' 답지 않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지리산 자락 마을의 오솔길, 그리고 그 주변에 핀 꽃, 그 주변 마을 등을 한 문장이면서도 한 문단 정도의 길이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었지 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의 그런 묘사에 있어서 아주 작심하고 한 듯하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지겨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 황석영 선생의 12년만의 장편은 당연히 참여적이고 목적 의식이 충만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지만, 한 번 읽어본다면 이 책이 얼마나 서정적인 글인지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은이는 "서사의 결여와 감각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문학이 풍부한 서사를 지닌 남성풍의 문학으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사실 풍부한 서정성과 정밀한 묘사와는 별도의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가 주는 힘이다.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그럴 수는 없겠지만, 잘 추리면 단편 하나의 분량 정도라고나 할까. 80년 광주를 경험한 한 사내와 그가 도피해서 만난 한 여인, 이 소설은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사내는 18 년을 감옥에서 살아왔고 그 여인은 감옥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결말은 감옥 속에 들어가 있던 사내는 사회로 다시 나와서 자신의 삶을 찾고, 감옥 밖에 살던 여인은 그 사내가 살지 못한 삶을 살다가 홀로 삶을 마감한다. 마치 감옥 밖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듯이. 그리고 사회에 복귀한 그 사내가 그 여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내용이다.

그 18년의 기간. 5월 광주로 시작해서 많은 자유와 민주를 향한 투쟁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선 사회주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데 절반, 그리고 군사정권이 끝나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한 때까지가 또 대충 절반이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바뀌었다. 18년 감옥살이를 한 오현우에겐 분명 생소하고 낯선 세상일 것이다. 18년 전 치열한 삶으로 인해 그 세상에서 격리되었던 그는, 이제 한윤희를 통해 지나간 세월 속의 세상을 본다. 빨치산 아버지의 상실과 그 이해에 이르는 먼 여정, 그리고 자신이 잡혀간 후 후배들을 도우며 본 반독재 민주화 과정, 그리고 독일 유학 기간을 통해 본 분단과 통일의 의미를 말이다. 결국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이었지만 시간적으로는 상보적인 한사람의 삶이라고 해야할 관계다. 그리고 다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삶이다. 바로 그렇게 이 소설은 사람의 삶이 주는 힘을 느끼게 만든다. 그것이 주인공의 허구적 삶일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지은이의 삶과 함께 겹쳐지면 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 그 흐름을 따라가기 조금 난해하다. 상권과 하권의 시점이 너무 갑자기 바뀌며, 마무리에 이르러선 힘이 조금 딸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물음.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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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동 정육점>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고 '삼양동(三陽洞)'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노랑머리>라는 저예산 영화의 희망이라고도 하고, 쓸데없이 벗는 준포르노라고도 하는 영화나 그 제작사에도 관심이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명했고 내가 조금 큰 다음에는 북한에서 탈출을 했다든지 아니면 북한에서 사기치고 도망을 왔다든지 소문이 돌았던 신상옥 감독의 아들에게도 관심이 없으며, 이 영화가 개봉해서 흥행을 할지 아니면 적어도 정말 저예산 영화의 한줄기 햇빛이 되어줄 지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아울러 이 영화의 스토리나 연극 배우출신의 무명연기자들에게도 미안하지만 큰 관심이 없다. 게다가 식탐이 있을 정도로 '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지만 결코 '정육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오직 "삼양동"이라는 제목을 보고 몰래 도둑질을 하다 남 모르는 사이에 누구엔가 들킨 듯이 놀랐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행정구역상에도 없는 "삼양동"이라는 지명을 들먹거려 영화를 만들었나에만 관심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의 모든 것들은 내가 자라온 '행정구역상에 없는 서울의 한 동네'인 "삼양동"에 대한 내 생각이든지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나이로 서른 하나. 곧 서른 둘이 된다. 결혼해서 1년 잠시 나가 산 것과 지금 일본에 나와 있는 것을 제외하곤 약 30년 동안 삼양동에 살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살 것이다. 나는 정말로 왕년에 공동묘지였던 곳에 세워진 '삼양'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 때 '삼양'교회를 처음 다녔으며 '삼양'슈퍼에서 주로 군것질 거리를 사먹었다. 어린 내가 그 많은 만화영화와 성룡이 나오던 홍콩 무술영화를 주로 보러 다니던 극장도 '삼양'극장이었고 우리집에 오려면 '삼양'사거리에서 부터 설명을 해야만 했다. 국민학교 이름을 이야기하면 "삼양라면"회사에서 만들었냐는 소리는 거의 빠짐 없이 나왔으며 급식으로 삼양라면이 나오지 않냐느니, 삼양라면 공장이 있냐느니 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삼양동이 왜 삼양동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예전에 못사는 세 군데 판자촌의 '양동'사람들을 이주시켰기, 또는 이주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삼각산 줄기에서 볕이 잘드는 동네라서 그렇다고도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줄기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자 같기도 하고, 예전엔 정말 모두 공동묘지였다는 것으로 보아선 전자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앞서 이야기한대로 삼양동은 행정구역에 없다. 60년대까지 예전에는 삼양동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 삼양동이란 미아 1, 2, 6, 7동의 산동네를 이름이다. 우리집 주소는 791번지 21XX호이다. 하나의 번지에 21XX번째 집이라는 의미다. 아직까지 이런 주소를 가진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3천번지도 있으니까. 791번지는 미아 1, 2, 7동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동이름은 다른데 번지수는 같은 희한한 일이다. 이는 서울에 대표적인 달동네인 봉천동과 맞먹는다. 봉천동이 TV 드라마 '인간 시장'이나 '서울의 달'로 유명했다면 삼양동은 '어둠의 자식들'로 유명했다. 어둠의 자식들의 저자이자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인공인 이동철은 5공 말기 6공초의 우리 동네 국회의원 (본명 이철용)이었다. 당시 전라도 농촌 어느 지역에서 국민학교 중퇴 학력의 의원이 당선되는 바람에 영예의 1등을 놓쳤지만, 이철용씨도 국졸로서 의원 중에 최저에서 두번째의 학력이다. 빈민운동가 출신에 장애인이었던 그는, 봉고차를 타고 다니고, 전두환이 국회에서 증언인지 사죄인지를 한답시고 어느 해 12월 31일 누눈가가 써준 것이 틀림 없을 모범답안을 읽을 때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서 끌려 나갔던 전력의 인물이다. 그가 선거에서 맞붙어 싸웠던 인물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유명하다는 대학 정치학박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출신의 배 머시기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배머시기는 4등 밖에 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일보엔 한국최고의 학벌과 최저의 학벌이 싸워 그가 이겼다는, 어쩌면 개천에서 용낫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기사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도 삼양동을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시절.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죽거리 좀 못가서 논현동이라는 곳으로 이사가자고 말씀을 하셨다. 전학이니 이사니 이런 것을 좋아할 리 없었던 어린 시절, 나는 거의 단식 투쟁 비슷하게 울고 불고 해서 그 이사를 좌절시켰다. 아직도 이런 달동네에 사는 건 네 놈이 그 때 이사를 안 간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그런 거야, 라는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잘 한 결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 당시 배나무 밭이 펼쳐져 있던 논현동은 지금 누구나 다 알듯이 서울에서 상당한 부촌이 되어 있다. 당연히 집값은 지금 우리집의 5배는 될 것이고. 하지만 나는 그런 계산보다는 삼양동이라는 환경이 나에게 준 영향을 더 감사하고 있다.

삼양동은 달동네(였?)다. 국민학교 때는 우리 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사는 어떤 화가라는 인간이 돈 벌어오라고 지 아들을 때려 애가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없어서인지 언제나 얼굴에 핏기가 없었던 국민학교 1학년 짜리 그 녀석은 어느날 부터 보이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는 통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우리 뒷골목에는 소위 결손 가정이랄까, 할머니와 고모랑 같이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주 순한 녀석이었지만 그 녀석 할머니가 어찌나 그 녀석을 위하셨는지 솔직히 우리는 그 녀석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결국 그 순했던 친구도 고3 끝에 가서 '강간 미수'로 퇴학을 당했고, 우스운 일이지만 덕분에 나는 내신 등급이 하나 내려갔다. 5만원인지 10만원인지만 가져가면 그 등급 다시 올릴 수 있다는 어떤 친구 엄마의 말을 들었지만 돈이 아까우셨는지, 돈이 없었는지, 아니면 그게 무슨 대수라고 생각하셨는지 우리 어머니는 그냥 무시해버리셨다고 한다. 하긴 대학 입시날도 한 번도 학교까지, 당시 우리는 대학에서 시험을 봤다, 오시지 않았던 전력의 부모님들로서는 그냥 '실력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튼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똑순이 김민희와 빨간 피터 추송웅씨가 나왔던 그 드라마 <달동네>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게 우리 동네 같은 곳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에 그 많은 봉제 공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가정집의 미싱들이지만)들을 보고 미싱 바늘을 가지고 놀았음에도 나는 박중훈이 <우묵배미의 사랑>에 출현하기 위해 삼양동 미싱 공장에서 연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삼양동이 대한민국 최고의 가내 봉제업 동네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내가 삼양동을 깨달은 것은 중학 때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삼양동 아이들이 반, 성북동 명륜동 아이들이 반 이었다. 다는 아니지만 삼양동 아이들은 대체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공부도 처지는 쪽이었고, 잘 알듯이 서울의 부촌인 성북동 명륜동의 아이들은 깨끗하고 "쩨"를 입고 다니고 공부도 잘 했다. 어느 8학군 출신의 사람이 놀랐던 일이지만 우리 중학교에선 70명 한 반에 보통 35명이 인문계 주간에 진학을 했는데 삼양동으로 대변되는 도봉구 아이들의 진학률은 상당히 낮지않았다 싶다. 어느 선생님은 아예 대놓고 삼양동 아이들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버스 회수권을 걷어 생활보호대상자(삼양동에 사는 애들이 대부분인 것을 말해 무얼 할까)들에게 나눠주었다가 애들이 받지 않겠다고, 우리가 거지냐고 울어버린 기억도 난다. 그게 그 선생님 딴에는 좋은 의미에서 한 일이었을 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삼양동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이전에는 삼양동에 사는 사람치고는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작은아버지 사업 보증으로 집과 전 재산을 허공에 날려버린 우리 가족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였기에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가 아는 것만도 참 많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린 자식들에게 쉬쉬하면서도 그랬으니 그 맘 고생은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아픈 일이다. 하나에 500원 남는 참기름 장사를 하시느라 그 무거운 참기름 병을 들고 전 서울을 누비신 어머니에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비어있는 집에 대해 투정을 했었다. 언젠가는 차비가 없어 학교에 못갈 뻔하다가 어머니가 동네 쌀집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빌려 오셔서, 또 그걸 바꾸러 다니느라고 그 아침에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지각을 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중 고등학교 때 내 사진 보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그 당시 나의 복장은 대부분 어른들의 '기지 바지'였다. 매년 쑥쑥 자라는 나를 감당하지도 못하고 돈도 없었던 어머니가 친척 어른들의 낡은 양복바지를 얻어다 입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등학교 때 어느 놈은 나를 '이모부 바지'라고 불렀다. 내 옷이 대부분 이모부 것들이었으니까. 참고로 나는 이모부가 세 분이나 계신다. 그 때부터는 조금씩 사회라는 곳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러니가 하나 있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김민기를 너무 좋아했다. 당시엔 김민기의 노래는 거의 대부분 금지곡이었다. 지금은 모 대학 교수님이 된 김창남씨의 <김민기>라는 책을 사서 혼자서 기타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런데 김민기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시간이었다. 우리 중학교는 여자 선생님이 다해야 다섯 손가락 안쪽으로 아주 드문데 새로 여자 음악 선생님이 오신 것이다. 그 여자 선생님과 어느 지방에서 전학을 온 맹랑한 녀석, 이렇게 둘이 나에게 김민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 맹랑한 녀석은 거의 만능인간으로서 공부는 물론 농구도 노래도 아주 잘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소위 삼양동도 성북동도 아닌 '여의도'에 사는 녀석이었다. 어느 날 그 음악 선생님이 녀석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켰는데 그 녀석이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아주 단조로운 멜로디의 곡이었는데 얼마 안 가 선생님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돌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런 노래 어디서 배웠냐느니, 음악시간에 가요를 부른다느니 해가면서 한 쪽 다리 들고 의자를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드는 최고급 난이도의 형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곡은 김민기의 "친구"라는 곡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가 5공의 딱 중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다. 하여튼 그 와중에도 히죽거리며 벌을 받았던 그 녀석은 곧 강남의 농구대가 있는 상아아파트(왜 이런 아파트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까?)로 이사를 갔고 (녀석이 우리 학교에 전학을 온 것은 강남 8학군 중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즉 녀석은 대기자였다) 우리는 농구공을 들고 친히 그 먼 곳으로 농구 원정을 다녔다. 농구대가 있는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그리고 녀석은 그 다음해 본래 가려던 강남의 중학으로 전학을 갔다. 하여튼 김민기라는 사람은 아직도 내겐 하나의 '상징'이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민기는 미대 출신이다. 어느 날 그가 석양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고깃배를 바라보며 멋있다고 감탄을 하자 그 옆의 어느 사람이 "저 사람들에겐 저게 얼마나 큰 노동인지 아느냐"고 쏘아붙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민기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 시절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면 집이 어디냐고 묻는데 '삼양동'이러면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러면 나는 그게 행정구역에 없거든, 하면서 미아1동 또는 미아리 고개 넘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왠지 킥킥거리면서 미국의 "텍사스" 얘길 꺼내곤 했다. 사실 삼양동은 미아리 텍사스와는 좀 떨어져 있다. 우스갯 소리지만 미아리 텍사스엔 지하철이 가지만 삼양동엔 지하철이(또는 지하철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삼양동은 미아리 텍사스에서 버스타고 10분 정도'라고 이야기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 듣는다. 실은 나도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독서실이 텍사스 맞은편에 있어서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망원경으로 그 동네를 넘겨다 본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높은 울타리가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삼양동은 텍사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텍사스보다 좋다는 것도, 그렇다고 텍사스가 뭐가 나쁘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삼양동은 텍사스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어떤 과선배가 취미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뭐 별다른 것이 없었던 나는 독서라고 대답을 했고, 누구를 좋아하냐고, 역시 별 생각이 없던 나는 당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문열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다짜고짜 "이문열 그런 새끼는 죽여버려야 하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 선배는 약간의 "운동권"비슷한 이미지였는데-물론 진짜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내겐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들의 명분과 주장에 대해 크게 반대해 본 적은 없지만, "4천만 민중"의 이름으로 내거는 그들의 자보와 행동들이 내겐, 내가 "삼양동"에 살았기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릇된 생각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학생 때는 실력을 키워 나중에 우리가 기성세대가 된 다음에 그 이상을 펼쳐 보이자는 그 과대망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생각도 한 적이 없다.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예전에 내가 속해있는 기독교단체의 어떤 간사님 동생이 우리학교 같은 학번 학생이었다. 91년 강경대군 치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연쇄적인 분신사건이 일어난 지 좀 지나서, 그 당시 그 간사님 동생이, 우리가 모임을 하는데 그 문 밖에 "노동자 농민을 다 죽이는 이 정권하"에서 우리의 "기쁜 노래소리"를 책망하는 쪽지를 붙여 놓았던 적이 있다. 그건 완전히 그 친구의 오해였다고, 당시 시위라든지 이런 저런 일에 그 친구처럼 나서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단체의 깃발을 들고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강경대군이 처음 실려온 세브란스 영안실의 시신 옆에 망을 봤던 두 사람 중의 한사람은 당시 다른 기독단체 사람이었고, 그 당시 학내 기독교단체들 사이에도 많은 의견이 나누어졌고 서로 논쟁도 상당히 있었다. 비록 행동통일을 완전히 이루진 못했어도 시위 중에 만난 "형제, 자매"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고, 당시 회장이던 내가 총무였던 후배 녀석을 시위대 속에서 만나 그냥 희미하게 웃었던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변명하고도 싶었다. 그 간사님 동생인,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대학 동창 친구는 그 후에 "현장활동"을 한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6년이나 전 이야기다. 어쨌든 그 친구의 '메모'는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어디 그렇다면 누가 더 평생 그렇게 민중을 위해 사나 두고 보자, 라는 약간의 치기도 있었다. 지금은 그냥 그것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나는 그 팬시점 분위기의 작은 편지지에 얇은 파란색 매직과 검은 볼펜으로 씌어진 그 글을 읽곤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나는 내가 단지 "삼양동"이라는 달동네에 산다는 것으로 나를 자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단지 내가 달동네에 산다는 것만으로 내가 민중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래도 우리집이 있는 쪽은 그렇게 판자촌이진 않고 게다가 우리는 '지주'아닌가. 하여튼 아직도 나는 이런 사회정의나 분배문제에 대해선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냥 그들과 '같이 사는 것' 뿐이 아닌가 싶다. 옆집에 누가 세들어 사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평등"이나 "더불어 삶" 같은 것은 많이 잊혀지는 듯하다. 그 덕분인지 적어도 내가 알기론 '날라리들의 대변자'같았던, 야한 여자를 좋아하던 마 무슨 교수님은 이제 진보인사이자 자유의 대변자 내지 수호자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런 것을 격세지감이라고 하는 것일까.

삼양동에 사는 것은 괴롭다. 중학교 때부터 지하철 공사로 그 다음엔 미아로 확장공사 그 다음엔 도시순환고속도로인가로, 지금은 재개발로 언제나 공사중이다. 지하철이 안 닿아서 불편한 것은 그렇다 치고 IMF 이전엔 교통체증이 심해서 택시들도 안 간다고 하는 곳이다. 사람은 그리 많이 사는데 근처에 중 고등학교도 별로 없어서 나는 매일 40분 이상 버스 타고 학교엘 다녔고 고등학교는 그나마 한번에 가는 것도 없어 갈아타야만 했다. 밤늦은 시간에 술먹고 싸우는 인간들의 악다구니 듣는 것도, 지저분하고 꽉막힌 시장통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도 유쾌하진 않다. 게다가 요즘은 많이 줄은 것 같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깡패들의 패싸움, 칼부림이라든지 소위 100번지, 또는 빡빡산을 근거로한 "쌍칼"이나 "은행나무파"등 무협지류의 불량배들은 아주 혐오스럽다. 비록 아내에겐 이런 게 '인간사는 곳'이라고 이야긴 하지만. 만약 맹자의 어머니라면 이런 곳에서는 또 한 번 이사를 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세월과 함께 삼양동도 이제 바뀌어가고 있다. 몇년전에는 주차 공간 부족으로 <카메라출동>에 나왔다더니 요즘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철거된 집들의 세입자대책위원회에서 확성기로 들려주던, 1년 가까이 24시간 계속되었던 <산자여 따르라>류의 민중가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집이 그 재개발 대상에 끼지 않은 것이 다행일까? 세입자와 집주인간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왠지 집주인 입장에 서고 싶지는 않다. 우리집엔 우리 부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세입자다. 허튼 생각이지만 만일 모든 집에 자기 자식들이 세를 들어 산다면 세입자의 입장을 집주인들이 대변해 주지 않을까? 하여튼 삼양동은 그 모양에 있어서만큼은 바뀌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안바뀌고 있는 것도 있다. 바로 동네 사람들이다. 한 집에서 30년이 넘게 산 우리 가족이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집 골목, 뒷골목에 있는 집주인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그대로 살고 있다. 달동네 집 팔아야 다른 동네 집 살 수도 없으니 그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또한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그 집들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우리집에도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 참 많이 바뀌었다. 도둑놈이 세들어 산 적도 있고 (이사가고 경찰이 찾아왔다)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었다. 그리고 남의 집에 세들어 살던 내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다. 처음엔 근처 동네로 갔다가 좀 더 외곽으로 갔다가 이젠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서울의 달동네에서 마저 쫓겨나 서울 바깥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삼양동도 바뀌어 간다.

그래도 나는 삼양동에 고마워한다. 어려서 아동 학대를 당한 사람이 나중에 부모가 되면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의 부모처럼 자신도 아동 학대를 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녀에게 너무너무 잘하는 부모가 되는 경우란다. 나는 그게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삼양동에 감사하는 것은 내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는, 산상수훈의 첫 마디는 내 신앙의 뿌리이기도 하다. 아직 일천한 사회경험일지라도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돈의 액수가 내게 판단기준이 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뭔가 보람있는 일은 없을까.

1999. 11. 25

Posted by 바이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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