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의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영화 <프리즈너스>를 보고)
올해 본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가 드니 빌뇌브의 <프리즈너스>이고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He is a good man."
그는 선한 사람이에요, 그는 착한 사람이에요, 정도로 해석 가능한 이 대사는 영화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주인공의 아내가 주인공 켈러 도버(휴 재맨)에 대해 형사 로키(제이크 질렌할)에게 한 말이다.
주인공은 어린 딸을 유괴당했고, 확실한 증거없이 유력한 용의자를 잡아 가두고 고문했다. 그는 직관적으로 그 용의자가 범인이라고 믿었고, 증거가 없다고 그를 풀어준 경찰을 불신했다. 영화는 자녀를 유괴당한 부모의 끔찍함과 그가 행하는 끔찍한 고문을 대비시킨다. 그의 아내는 그렇게 끔찍한 고문을 행한 남편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고? 그는 딸을 사랑했으며 이 일은 유괴된 딸을 되찾기 위한 방법이었으니까. 여기에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선하다는 건 뭔가."
기독교인이라면 대충 외울 수 있는 성령의 열매 9가지가 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9가지이다. 이 중에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는데 "양선"이라는 단어이다. 보통 영어로는 goodness라고 번역하고 헬라어 원문에는 "아가도쉬네(ἀγαθωσύνη)"라고 하는데, 착함, 올바름, 너그러움 등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고 한다. 사람에게 사용된 경우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사도행전 11:24)라는 구절에서 나오는데, 그럼 성경 속 바나바와 영화 속 주인공은 둘 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착한 사람일까?
아마 누군가에게 착함이란 착해빠졌다는 말처럼 조금 모자라는 것일 수도 있고, 착한 몸매라는 말처럼 누군가에겐 그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착한 소비라는 말처럼 윤리적인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프리즈너스>의 주인공 아내에게 착함이란 가족(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었을 것 같다.
나는 요즘 사람들마다 각자 "정의(definition)"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큰 테두리에서 비슷하면 그냥 같은가보다, 생각하며 깊이 따지지 않고 살았지만, 이제는 개개인이 자기만의 정의를 갖고 사는 듯하다. 그리고 타인의 정의가 자신의 정의에 맞을지 계속 의심하고, 맞지 않으면 쉽게 멀리 하고 관계를 버리는 것 같다. 진짜 비극은 같은 종교인, 같은 정당인 등 동일한 큰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회적 연대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어려워진 것은 아닐까 싶다.
이하는 <프리즈너스>의 결말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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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는 선한 것 같은 주인공의 악행을 드러내고, 과거 악에 빠졌던 형사 로키가 문제를 해결한다. 미성년자 성추행 전과의 전직 신부는 연쇄살인마를 죽이고, 유괴 피해자는 가해자로 몰려 고문을 받으며, 어린 자녀를 잃은 신앙인은 다른 신앙인에게 같은 아픔을 주려고 그를 악마로 만든다. 이러한 부조리한 삶을 사는 모두가 일종의 "수감자들"인 셈이다.
전작 <그을린 사랑>에서 중동의 종교 전쟁을 통해 벌어진 한 가정의 지옥도와 구원의 길(?)을 그려냈던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에서 신념의 전쟁을 그렸다. 간담이 서늘하고 아프지만 그만큼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였다.
[덧붙임 1]
좋은 영화는 보고 나면 남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게 만든다. 그런데 많은 영화 평자들이 주인공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다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실하다는 건 뭔가."
[덧붙임 2]
공권력을 존중하기로 세계 1위라는, 그래서 경찰들이 범죄자 또는 용의자를 마구잡이로 다루는 것을 부러워하는 미국에서 공권력을 못 빋어 자경단 영화가 많이 나온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