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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즐거워지고 싶은 아버지들의 판타지

바이오매니아 2007. 11.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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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지고 싶은 아버지들의 판타지
 
그런 영화가 있다. 화려한 편집도, 독특한 촬영 기법도, 이야기도 새로울 것이 없고, 후대에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영화사적으로도 딱히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데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 적어도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이준익이라는 감독이 21세기 초에 존재하는 의미는 아마 그 정도 지점이 아닐까 싶다. 동시대인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판타지 감독.

<즐거운 인생>을 즐겁게 보고 나왔다. 예상대로, 본의 아니게 몇 개월(이라고 믿고 싶은) 기러기아빠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의, 40의 문턱에 다리를 걸친 남자가 혼자 보기에 딱 좋은 영화였다. 시놉시스만 봐도 훈훈한 결말이 눈에 보이는 이야기, 왕년의 그룹 활주로와 백두산을 연상시키는 그룹 이름 활화산, <한동안 뜸 했었지>, <불놀이야> 등의 귀에 익숙한 고전, 그리고 처음 듣지만 곧 익숙해지는 <터질꺼야>, <즐거운 인생> 등의 흥겨운 주제가, 영화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게끔 실제로 열심히 연기가 아닌 연주를 하는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은 이 영화에 비판적인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물론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이야기나 리얼리즘을 기대한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잊지는 않은 건지?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영화를 만들려면 소위 “와라나고 운동”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의 연장 상영을 촉구했던 관객 운동)도 감수해야 하는데, 그걸 “충무로에서 남의 돈 무서운지 가장 잘 아는 감독”이라는 이준익 감독에게 기대하기는 무리가 아닌가 말이다. 이 영화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 성우(<즐거운 인생>에서는 상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장춘몽인데 말이다.

<즐거운 인생>은 판타지다. 그것도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중년 “아버지”들의 판타지. 이 영화의 세 주인공은 모두 아버지다. 사춘기가 시작된 것인지 핸드폰도 끄고 밤늦게 귀가하는 중학생 딸을 둔 기영 (정재영), 전교 회장에 뽑혀서 돈 걱정하게 만드는 아들을 둔 성욱 (김윤식), 아예 자녀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혁수 (김상호). 그리고 사진으로만 나오는 이들의 친구 상우도 음악을 하는 아들 현준 (장근석)과 사이가 안좋은 아버지였다.

일찌기 신해철이 <아버지와 나>에서 읊었던,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리는 아버지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지는 꽤 되었다. 작자조차 미상인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글은 아직도 블로그를 떠돈다. IMF 실직사태부터 군가산점 위헌 판결을 거치며 온라인 댓글족들은 “여성(가족)부”의 기사만 나오면 악플을 달기에 바쁘다. 가히 부권 회복시대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이 대책 없는 아버지들의 퇴행은 나름 즐거운 인생을 사는 삶으로 관객들에게 용인된다. 중년 남성의 자아찾기로 위장한 아버지들의 판타지는 나이와 성별, 심지어 집나간 아내마저 뛰어넘어 모두에게 환호를 받으며 끝이 난다. 하지만 뭐 어떤가, 모두가 한 번쯤 꿈꾸어 봤을, 극중 성욱의 대사처럼 “당신도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는 판타지인 것을.

하지만 이런 즐거움 속에 당연히 불편해할 쪽은 그 가족에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너무나 평면적인 아내들, 철없는 남편 먹여 살리며 “매일 힘들고 매일 후회”하는 아내, 오로지 자식 공부시키는 것만이 사명이라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하며 참고 사는 아내, 기러기엄마로 캐나다에 가서 바람이나 나는 아내들이 나오는 영화라니.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남편의 공연에서 환호까지 해야 한다고?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야 말로 이 영화가 참된 아버지의 판타지로 완성되는 부분이다. 사실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큰 판타지는 자신은 언제나 순수하지만 “마누라”라는 존재가 자신의 순수를 짓밟고 현실을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분수에 넘치는 교육비를 지출하고 경제력을 뛰어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즐겨하는 변명이 있다. “나는 그냥 아무데나 살아도 되는데 우리 마누라가…”자신의 욕망을 아내에게 투사하여 아내를 악역으로 자신을 선인으로 둔갑시키는 판타지.

하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안다. 누구보다 성공과 권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비록 내가 악역을 맡기는 싫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아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의 아버지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속의 판타지인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인생>은 현실 속에 실재로 존재하는 판타지를 발판으로, 팍팍한 현실을 도피하는 판타지에까지 도달하여 흥겹게 놀아보는, 그야말로 즐거운(?) 영화인 것이다.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준익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 “놀이”에 능한 감독이다. 전쟁을 놀이터로 묘사한 <황산벌>, 놀이 그 자체였던 <왕의 남자>, 88년 가수왕 최곤의 <라디오스타>, 그리고 활화산의 <즐거운 인생>까지, 그의 영화는 언제나 놀이가 주된 내용이었다. 놀러 가서 업무 이야기하는 사람이 짜증나듯이, 이야기가 너무 전형적이라 진부하다든지, 갈등구조가 평면적이라든지, 공연장면에서 실제 연주에 힘쓰느라 배우들의 연주 연기가 너무 뻣뻣하다든지, 대책없는 저 아저씨들의 앞날이 궁금하다든지 하는 것은, 마지막에 카메라가 공연장에서 빠져나오듯이 영화관에서 나온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좋다. 뭐 ‘활화산 조개구이’가 대박까지 난다치면 정말 즐거운 인생이라고 부를 만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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