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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이야기

바이오매니아 2014. 1. 1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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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가 한동안 뜸했었죠? 실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설마 하며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경황이 없는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담도암 진단받으시고 닷새 후에 수술하시고 수술 후 일주일 만에 소천하셨으니 참 급히도 가셨네요. 


아버지 돌아가신 날 병원 로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장식.


십여년 전에 "나의 어머니 이야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 거기에 묘사했던 제 아버지는 이랬습니다. "맘 좋은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당신 동생에게 전재산(장난 아니게 큰 돈이었다)을 날리셨다. 그리고 또 나중에 형님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려드렸는데 큰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것도 없는 돈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형제들 때문에 언제나 어렵게 사셨던 분이셨죠. 하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형제들을 원망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잘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분이셨죠. 


오히려 아버지는 형제 우애를 유난히 강조하셨습니다. 저와 제 동생은 아버지께 평생 딱 한 번 매를 맞았는데 바로 둘이 싸웠던 때입니다. 집에서는 한없이 유하셔도 밖에 나가면 매우 무서운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저희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어릴 적 큰아버지께서 가끔 아버지 고등학교 때 싸움했던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건 거의 활극 수준이었지요. 주워 들은 이야기라 실제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가 제 팔목을 잡고 가뿐하게 팔씨름을 해서 이기실 정도였으니까 힘은 정말 세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좀 외로운 분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가의 자손답게 제 할머니가 여러분인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당신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고, 그나마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공부도 제대로 못했고, 일가 친척들에게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형제들과도 저렇게 돈 때문에 얽힌 삶이었으니까요. 그래서일까 아니면 직업 때문일까, 아무튼 아버지는 술을 참 많이 드셨습니다. 건축 관련 일을 하셨기에 일감이 있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거의 맨정신의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죠. 어릴 때부터 그걸 보고 자란 저는 술을 무척 싫어했고 지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를 나누며 친교의 의미로 가볍게 즐기는 외국의 술 문화를 보면서 조금 생각이 바뀌기는 했지요. 


아버지는 7년 전에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다행히 위암 초기였기에 수술 후 건강을 회복하셨죠. 당시 저는 미국에 연구원으로 있었고 아내는 막 유학 생활을 시작한 때였는데 제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아버지 건강이었습니다. 위암 수술 이후에 아버지는 술 담배를 다 끊으셨다가 몇 년이 지난 후부터 막걸리를 다시 한두 잔 드시기 시작하셨지요. 사실 저는 그것이 좀 못마땅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막걸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께 술 그만 드시라고 잔소리만 한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아버지께서는 제게 뭘 해라, 하지 마라, 평생 한 번도 명령하지 않으셨는데 말이죠.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지난 추석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홍대 앞 <월향>을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날 따라 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막걸리를 좋아하시니 제가 유명한 곳에 한 번 모시고 가겠다고 해서 홍대 앞까지 찾아가게 되었죠. 월향의 현미막걸리, 송명섭 막걸리, 이화주 등을 드시면서 즐거워하셨던 모습을 뵈었던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막걸리집 <월향>


요즘 모 웹사이트 대문에 "고아가 되기 전에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써 있더군요. 그렇다면 이제 저는 반쯤 어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갖 집안 일과 번거로운 일이 생기면 아버지께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는데 이젠 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커다란 빈자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며 사시는 것이 여기 계신 것보다 더 좋으셔서 일찍 가신 것이겠지요. 언젠가는 저희도 다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뵐께요. 아버지. 감사했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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