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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주인장 이야기/지극히 개인적인

교수직을 그만두면서 (또는 블로그를 다시 열면서)

by 바이오매니아 2022. 3. 12.

지난 2월 말에 15년(14년 6개월)간의 교수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코로나 시국에, 앞으로 10여년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그 좋은 사학연금 손해도 엄청 큰데, 도대체 왜 그만두느냐는 이야기를 엄청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가족과 같이 살고 싶어서."
"연구와 수업만 하고 살 수 없어서."
"논문과 보고서 쓰기 싫어서."
"하고 싶은 것 하고 살고 싶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읽고 쓰면서 살고 싶어서."
"교수가 될 때의 목표를 이룰 수 없어서."
"(학내)정치 하기 싫어서."
"생계형 교수 하기 싫어서."
“우리나라 대학이 더 이상 대학이 아니라서”
등등

그런데 아직도 왜 그만두었는지,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긴 힘이 듭니다. 확실한 건 최근 몇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대학전>(<대한민국 치킨전>의 패러디)이라는 책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머리가 나빠서 곧 다 잊어버리겠지만 말이죠.

교수를 꿈꾸던 시절 세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1) 수입의 10분의 1은 학생들에게 쓴다. 2) 전공 실력과 인격적으로 훌륭한 제자를 최소 세 명을 키운다. 3) 그 중의 한 명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고 조기 은퇴한다(물론 잘못하면 채용비리가 됩니다!ㅎㅎ). 그 목표도 다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15년의 절반 가까이를 학과장으로 일했습니다. 여기 저기 다 외우지도 못하는 위원회와 TF 팀에 불려다니면서 학교와 학과를 위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게 학교와 학과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 일 한다고 연구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학회에 가면 맨날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항상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수업하는 것만은 제일 즐거웠는데, 학교 일과 코로나로 수업도 충실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3월 초에 신입생들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고, 사는 동네와 신상명세까지 훑었었는데 이젠 그 관심도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더 이상 학생들과 가까운 젊은 교수라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반농담으로 사표 낸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정년보장을 받은 후부터는 진심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가끔 했습니다. 그 와중에 조형근 교수님의 칼럼 "대학을 떠나며"나 오찬호 선생님의 <진격의 대학교> 같은 책이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재작년 초에 아내가 정 그렇다면 그만 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어버이날 아이들이 “5년 넘게 주말마다 올라오느라 너무 수고 많았고 감사해요.ㅎㅎ 그런데 이제 인생 2막으로 같이 살아도 너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떨어져 지내면서 정말 보람있고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면 모를까, 요즘 많이 지쳐보여서 마음이 아파요.ㅠㅠ”라고 써서 카드를 주길래 그날로 사직을 결심하고 사직서를 썼고, 사직하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누가 말이 씨가 된다고 그딴 소리 하지 말라길래, 말이 씨가 되라고 여기저기 더 열심히 하고 다녔죠. 하지만 학년은 마쳐야 하겠기에 연말 아내 생일에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인생 2막을 살기로 한 것이죠.

사직을 허락받은 날 페이스북의 비공개 기록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 학과의 교수님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셔서 저는 참 행복하게 교수 생활을 했습니다. 15년 동안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교수님들이라면 대부분 이해하실 겁니다. (그만큼 교수들은 고집이 세고 많이 싸웁니다.) 사실 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죄송하고 미안해서 사직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인생 2막은 친구가 시작한 스타트업 연구소의 연구소장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미생물 감염병과 항염증제 등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기업입니다. 연구원이 20명이나 되고 한 동안 쓰지 않던 뇌를 써야 해서 요즘 고생이 좀 심하지만, 뭔가 새로운 자극이 되고 좋은 것 같습니다. 교수 생활이란 게 매년 학사 일정에 맞춰서 뭔가 뺑뺑이 도는 느낌이 강하고, 그래서 정교수 정도 되면 교수들이 정치나 골프장 같은 다른 길로 외도(?)를 많이 하는데, 아예 다른 일을 하니까 확실히 긴장도 되고 좋습니다.

어떤 시골 할머니가 알려주신 지혜 (출처: 유퀴즈)


그리고 그 덕분에 다시 공부도 할 겸 블로그도 새롭게 해보려고 합니다. 한 때는 바이오텍 분야를 전방위적으로 다루면서 아는 것도 꽤 많았는데, 그 사이 과학기술 발전이 눈부셔서 이제는 새롭게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더군요. 그래도 재미있게 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블로그에서 자주는 아니겠지만 가끔 뵙도록 하지요. 이것으로 블로그 재개장(?) 인사를 가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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