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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우린 다 병신이다!

바이오매니아 2003. 6.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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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끄적였던 글을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쓴다. 제목을 바꿀 생각이다. "우린 다 병신이다~". 그래 이게 좋겠다.

'병신'이라는 말, 쓰면 안되는 말이다. 일본에서 놀랐던 것이 있다. 주변에 일본어 잘 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라. 장님이 일본말로 뭐냐고. 아마 잘 모를 것이다. 그럼 앉은뱅이는? 이런 말을 차별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차별어를 사회적으로 안쓰기로 했고 점점 없어져 간다고 한다(뭐 찾아보면 없지는 않겠지만). 전 세계에서 욕이 가장 발달했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떤가? 그건 애들만 보면 안다. 애들이 다른 친구들을 놀리는 말. 이거 거의 전부 차별어다. 하다못해 '숏다리'까지 나왔다. 작년에 한겨레에 어느 목사님이 차별어 쓰지 말자는 운동을 하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무튼 '병신'도 차별어가 된 말이다. 원 뜻이야 '병든 몸'이라는 뜻일지 몰라도. 따라서 이런 말도 안 써야 된다. 하지만 이 말 말고 다르게 표현할 방도를 못찾겠다. 그러니 한 번만 양해를 구한다. <오아시스>는 말한다. 우린 모두 병신이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봤다. 이 영화가 스펙터클 영화라서가 아니다. 문소리가 연기하는 한공주를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쥐어짜며 이야기하는 그 내용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하니 나도 한공주처럼 발이 꼬이고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게 신체적인 불편함이라면 내용도 불편하다. 사회부적응자와 지체장애인의 사랑.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더 불편하다. 그래, 사실 우린 우리와 다르면 불편하다. 간밤에 썼던 내 글을 다 지운 이유가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다. "우린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감독의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온 '범주' 또는 '경계'의 담론이 주는 유익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다. 대체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정상인이란 말인가. 사실 모두 장애인이고 모두 정상인이다. 그래 맞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사실 생각이 조금만 있다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영화에서는 누구도 악인이 아니다. 마치 몇몇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동생을 이용해 아파트를 얻은 오빠는 나쁜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생일이라고 찾아오고 2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그의 이름은 한상식이다. 그게 우리의 상식이라는 말이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동생을 대신 깜빵에 보낸 형은 나쁜 놈일까? 아니다. 그래도 그 형은 끝까지 동생을 사람 만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형수가 삼촌 설경구의 무릎에 옥도정기를 발라주며 하는 대사는 이 영화의 압권이다. '난 삼촌이 정말 싫어요. 삼촌이 제발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형수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거면 아예 집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카센터에서 자는 것도 불안해서 그냥 두지 않았을 거다. 그건 정말 사회부적응자를 둔 가족의 모습이다. 악한도 그렇다고 선인도 아닌 딱 그만큼의 우리 사람들 모습이다.

선인도 악인도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우리 사회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소외당하고 우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성찰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여백을 이 영화는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 영화가 무슨 계목영화가 아니다. 그건 그냥 여백일 뿐이다.

문소리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건 말건, 이 영화의 장르가 멜로건 판타지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건 말건 아무튼 오아시스는 봐야 되는 영화다. 영화가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오해서도 아니다. 영화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학가 출신의 감독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권하는 바이다.    

[덧붙여]
솔직히 내 취향엔 <박하사탕>의 울림이 더 크다. 그건 아직도 나의 사고의 기준이 과거에 많이 붙잡혀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박하사탕>과 비슷한 다른 영화다. 삶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고 이야기에서 다르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가장 많은 의문을 가졌던 내용이 바로 자신을 범하려던 홍종두에게 전화하는 한공주의 설정일 것이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로는 자신의 집을 무단침입해 자신을 거의 무시하고(마치 애완동물을 보듯이) 사랑을 나누는(?) 옆집 부부와 자신을 이용해 아파트를 당첨받고도 자신을 데리고 가서 이용해 먹은 오빠에 대한 실망과 외로움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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