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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는 그 친구에게 희망을 주었을까?

바이오매니아 2008. 5. 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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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젊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 친구였죠. 그 친구는 가난이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남앞에 드러내는 것이 더 싫다고 말했습니다. 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고, 하필이면 그 때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책 <완득이>를 그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 그 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제부터는 순전히 제 기억과 남은 감정을 모아서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솔직히 <완득이>의 서두에 난장이가 나오지 않았으면 그 책을 끝까지 읽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인간승리 드라마"삘(feel)"이 나는 다큐멘터리나 책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책의 둘레 둘레에 쓰여진 "완득이, 파이팅!" 이라는 문구도 그랬습니다. 아마 가장 편파적으로 부자를 옹호하는 신문의 기자가 완득이 파이팅을 외치는 현실이 마뜩치 않은 것은 제 심성이 삐뚤어졌기 때문임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뭔가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책이 없어서 이 말을 윤도현씨가 했는지 아니면 그 기자분이 했는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초반에 난장이가 등장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난장이"라는 단어는 거의 자동적으로 제게 오래전에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생각나게 합니다. 난쏘공은 바로 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그리고 아직도 저의 부모님께서 40년이 넘도록 살고계신 동네가 등장하는 저의 첫 소설이었습니다. 어쩌면 완득이가 제가 살던 그 동네에 사는 아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후부터 전 그 소설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냥 인간승리 드라마 류의 소설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저는 완득이에게 감정이입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가 빠져들어간 대상은 완득이가 죽이고 싶어했던 담임선생 "똥주"였습니다. 저 녀석은 대체 왜 저 선생을 싫어하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인데, 라는 의문은 책의 절반을 지나며 해소되었고, 이 소설의 한가지 맘에 안드는 부분 (똥주 선생이 완득이 아버지와 동업을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약간 억지 같습니다.)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 소설을 완득이의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아마 완득이가 가장 많이 성장한 부분이 바로 똥주 선생님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과 그 환경을 받아들인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빈민, 장애인, 다문화가정이라는 트리플 크라운을 쓴 완득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아이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주먹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원래 건강했었지만, 이 소설을 통해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완득이의 건강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 첫걸음은 자신의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개 어려움과 난관에 대처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맞서는 것입니다. 회피는 다시 현실도피나 왜곡된 성공의 욕구로 발전됩니다. 하지만 완득이는 회피의 길에서 현실에 맞서는 길로 들어섭니다. 완득이도 처음엔 분명 자신의 현실을 떠벌이고 다니는 똥주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회피하고 싶어했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절정은 여기, '제 어머니십니다.' 였죠.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인 다음에 완득이는 과연 성공적으로 그 길을 갔을까요?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 속에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완득이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니까요. 청소년을 넘어 청년 완득이의 삶이 어떠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제게는 조금 지나친 자의식 과잉으로 읽혔던(하긴 젊어서 자의식 과잉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젊은 날의 초상>이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들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정도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득이에게 환호하는 지점은 앞서 말한 완득이의 그 건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럼 세상엔 이렇듯 건강한 완득이들이 많이 있을까요?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하긴 누구나 다 가는 길을 걷는 사람을 보고 환호를 할 이유는 없겠지만, 아쉽게도 세상의 완득이들은 점점 더 그 건강함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는 발전했고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만큼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럴 수록 어려운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어느 컬럼에서 보고 무릎을 쳤던 말, 일찌기 헨리 죠지의 통찰인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덕·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는 경구를 여기서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이 더 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가 김려령씨는 한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원숙하게 완득이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거 이런 환경을 다룬 소설들이 그 지긋지긋한 일상과 구질구질한 삶의 솔직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식이었다고 한다면, 김려령 작가는 신세대답게 쿨하게(?) 적절한 사회적 현실과 그 시대 속에 놓여진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애도 있다, 며 약올리듯이 말입니다. 혹시 그게 구질구질한 가난 이야기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요즘의 트렌드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건강함이 반갑습니다. 그리고 그런 완득이들을 세상에서 좀 더 만나고 싶습니다.


완득아, 그 젊은 친구에게 희망을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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