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11. 16.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다.

위 책은 '문화비평에세이'라고 되어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 비교 에세이'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먼 타국의 망명지에서 말걸기로 시도한 이 책의 출판기념으로 20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가 돌아갈 때 그는 "마음이 살쪘더구만, 필요 이상으로…”라고 짧게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가 당시의 한국 사회랑 타협하지 않고 싸울 때의 그 청년, 그 젊은이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20년이라는 시간과 공백을 그는 메꿀 수 없었던게 아닐까...

프랑스라는 나라. 단 한번도 그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존심이 세다든지, 영화가  재미없다든지, 핵실험을 강행했다든지, 그 들 역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든지, 최근 유행하는 철학한다는 인간들은 그 동네 출신이 많다든지,  뭐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 예전에 문학을 하는 인간들 중에 왜 그리 불문과 출신이 많은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김화영 교수의 문학평론인가 에세이인가를 읽고  프랑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내 기억도 믿을 수 없다) 하여튼 김현이든 최윤이든 몇몇 관련 인물이 있었다고 해도 프랑스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아니, 모국이 아니 그 어느 나라도 내겐 생소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말한 프랑스라고 함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으로 구별되는 자유 우익도 아니고, 소련으로 대변되던 (현실)사회주의도 아니고, 못사는 제 3세계는 더욱 아닌 세계를 뜻한다는 것을.  

지은이가 들려주는 프랑스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3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에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며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 사회에 편재하는 토론 문화, 다른 나라에 대한 자신감, 문화에 대한 가치 등등은 참 부럽기 그지 없다. 똘레랑스로 대변되는 그것 말이다. 또한 지은이가 지적하듯이 그 와중에 파생되는 개인주의로 인한 부작용 (예를 들면 외로운 노인문제 따위)도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好/不好)말고 바람직함(善/惡, 아니면 正/邪)의  문제로 읽어보자. 여기서 어느 사회나 문제는 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최악이다. 어쨌든 결국 사회와 개인의  조화의 문제인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개인적인 부분의 삶과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결국 지은이의 말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갖는 이유가 말이다.

얘기가 너무 장황해졌다. 더 간추려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가 그들에겐 가능하고 우리에겐 부족하다는 책망이다. 그  두가지가 같은 개념인지 혹은 다른 개념인지에 대한 논쟁을 걸어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받는 느낌은 好/不好의 문제와 正/邪의 문제를 그들은 적절히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정했다. 인간 개개인에겐  개인주의이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는 면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인,  그들의 정치가 좌우연립정부이듯이, 그런 조화(똘레랑스라고 해도  좋을지 몰라도)가 우리에겐 없다는 것이다. 과거까지, 어쩌면 지금도,  빨갱이나 빨치산이 주요 이슈가 되는  사회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면 또 희망은 없다. 하지만 자꾸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변명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타국에서, 아니 프랑스에서, 그는 20년을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하면 미안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눈으로 타국의 반대말인 자국(自國), 혹은 모국을 바라본다.  체험과 현실의 차는 얼마나 다를까,가 첫번째 나의 의문이다.  그는 20년 동안 바뀐 조국, 어느면에서는 바뀌지 않은 조국,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고한 사람이다. 대부분 언론이라는 일방적 매체에 의해, 그리고 약간의 지인들의 체험담 같은 것으로.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더 풍부한 것! 그 한가지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렇게까지 형편없기만 하지는 않다고, 쪼그맣게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선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 말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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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일본 발음으론 '라브 레타')를 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이 있(단)다. "의식의 흐름" 어쩌고 하는, 그 책 설명 다음엔 대부분 제임스 죠이스의 "내 젊은 날의 초상"인가하는 소설이 나오는, 11 권인가  하는 긴 소설. 제임스 죠이스의 그 제목만 멋있는 소설을 읽고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소설을 팽개친 기억이 난다. 어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곤란하지만 일단 그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있다.  "시간"이란 뭔가의 문제는 몇년 전에 한 번 우리 곁을 휩쓸고간 유령이다.  <이다>라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무크지인가에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던, 과학자의 시간, 역사학자의 시간, 현실의 시간, 타임 머신, 내가 사용하는 시간과 남이 사용하는 시간, 그리고 같이 보내는 시간...

이 영화는 그 시간을 찾는 영화다.  과거를 잊은 사람(여자 이츠키)과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히로꼬)의. 그 둘은 동일인(1인 2역)이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여자 이츠끼는 아버지, 히로꼬는 애인)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살아온, 자신과 관계가 있는 남자(남자 이츠키)의 시간을 반추한다. 하지만 이 둘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한명(히로꼬)은 그를 잊고, 다른 한 명(여자 이츠끼)은 그를 찾는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영화보는 재미로 따지자면 여러번 봐도 좋다.  예를 들어 첫 장면의 여자는 히로꼬일까 여자 이츠끼 일까를 맞춰 본다든지, 1인 2역하는 히로꼬와 이츠끼의 차이점이라든지,  과거 히로꼬 사이코 중학 동창 여학생이 현재 도서관에서 일하는 친구인가, 라든지, 남자 이츠키가 미대생이라는 암시를 찾는다든지, 남자 이츠키 방에 걸린 산의 그림이 그가 죽은 산의 그림인가라든지, 하다 못해 그 심한 간사이 지방 일본 사투리라도. 영화 속에 숨겨놓은 퍼즐을 맞추는 것이 관객들이 영화를 좋아하게 만드는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퍼즐이 너무 어려우면 예술영화가 되고, 너무 쉬우면 애들 영화가  되고 적당하면 이런 영화가 된다.  

어찌 보면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하이틴 로맨스 -라고는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지만-답다고 할 지도 모르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때문이다.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에게 반납을 부탁한 책.  프루스트는 우리의 자아(自我)란 시간 속에 매몰되면서 해체된다고 믿는(단)다. 때문에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사랑이나 고통에서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단)다(어느 기자가 쓴 그 책의 평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자아를 찾는 영화도 되겠다. 히로꼬는 3년 전에  산에서  조난 당해 죽은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함께 조난을 당했던 이츠키 친구의 연인이(되려고 한)다. 어느 날 남자 이츠키의 졸업앨범을 보고 이제는 없어졌다는  그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던 히로꼬에게 이츠키(여자)에게서 답장이 오고, 결국 중학시절 동명이인의 같은반 친구라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남자 이츠키가 좋아했던 것은 여자 이츠키였고 자신이  여자 이츠키와 얼굴이 꼭같이 생겼기에 남자 이츠키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를 잊는다. 하얀 눈밭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영화는 처음에 히로꼬가 중심이었지만 뒤로 갈 수록 중심은 여자 이츠끼에게 옮겨간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가 기억에 없다. 그냥 이름이 같아서 괴로왔던 같은 반 남학생정도다. 그러나 히로꼬의 편지를 받고 기억을 되살리며 남자 이츠끼가, 사실은 자기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엉뚱하게, 어쩌면 당연하게  내가 계속 이 영화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앎"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여자 이츠끼는 자신은 그 남자 이츠키를 좋아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  이츠키도 자신을 좋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모른다).  그러다가  점점 남자 이츠키의 괴팍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니 자기를 좋아해서 그랬던 것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알게 된다). 게다가 자신은 전혀 좋아함의 감정이 없었다고(모른다) 영화가 진행되지만 화면에는 여자 이츠키 역시 남자 이츠키에 대한 호감이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예를 들어 달리기 장면, 꽃병을 집어던지는 장면 등).  "앎"과 "모름"의 차이는 뭘까? 하나의 사실(事實과 史實을 합쳐서)과 의미, 그리고 망각.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망각되지 않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지식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갖고 있고 어떤 것을 잊었는가, 하는...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 속에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잊어야 하나, 에 대한...

계속되는 삶 속에 남들에 비해 내 "앎"의 짧음으로  가끔 스스로 실망하곤 한다. 스스로를 위로하자면 "아는 척 함"의 짧음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성경에서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안다"(性의 개념까지 포함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그만큼의 의미라는 것이다.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듯하다. 힘들다고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글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소설의 제목에 대한 감상인지도 모르겠다. 엉망이다!  


[덧붙임] 곧 개봉한다는 이 영화를 보고 일본 영화의  저력이라든지 매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일본 영화의 침입 등에 대해 논하게 된다면 그건 오해다. <러브 레터>는 좀 특별한, 또는 특별히 한국사람 입맛에 잘 맞는, 또는 좋은, 일본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진실을 보고 '한국 여자는 모두 미인'이라고 하는 거랑 같다는 얘기.

[더 덧붙임] <퍼즐 찾기> 말고도 좋은, 또는 재미있는 영화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한가지는 뚜렷한 캐릭터다. 이미 '모래시계'에서  확인한 바이지만. 영화에서 버릴 인물이 하나도 없으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영화. 하나의 주제를 향해 모든 인물등이  유기적으로 맛물려 돌아가는... 예전 죠이 수양회 진행부에서 들은 얘기군...이상웅간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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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토토로>를 수차례 보다.

이 아니메는 우리 부부의 일본어 공부용 교재이자 아침 저녁 밥상의 반찬이자, 왜냐하면 밥먹을 때 틀어놓으니까,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 작품 중에서 내가 제일 즐기는 작품이다.

재작년인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이란 감독의 영화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평론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용어가  <착한 영화>라는 말이었다. <내 남자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보여준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달랐다." 기존에 우리 입맛에 맞았던 영화,  우리가 보아온 영화하고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영화적 기법만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자본의 침입으로  삭막해져버린  도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재미 (라는 용어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있는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미야자끼 감독. 일본어 공부를 핑계삼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극장판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희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마녀의 택급편>, <루팡3세-카리오스트로 성>을 모두 보았다(이는 전적으로  내 충실한 후배 양기영군의 덕이다). 위에 언급한 그의 영화 중 단 두편만이 소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바로 <이웃의 토토로>와 <모
노노케 희메>.

엄마가 병원에 있어서 병원 근처의 시골로 이사온 두 자매.  11살 짜리 언니는 엄마의 노릇을 하고 동생은 아직 어리지만 떼를 쓰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 오히려 겁없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아빠. 절대 야단치지 않고, 전직 유치원교사 출신인 우리 아내의 말에 빌리자면 아이들을 시켜먹을 줄 아는 아빠. 새로 이사온 사람들의 집 정리를 도와주는 이웃들. 괜히 시큰둥하게 굴어도 비올때 우산을 빌려줄 줄 아는 옆집 남자아이. 수업시간에 불쑥 찾아온  동생과 같이 수업을  받게 해주는 선생님과 반 친구들. 동생이 없어지자 다 같이 발 벗고 나서는 이웃들... 감히 이런 세상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주변이 허전하고 관계가 단절된채 우리가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 동안 국적 불명의 아니메만을 만들어와서  일본인들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일본의 5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었다는 이 1시간 30분짜리 만화영화는 정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경림이의 표현). 하지만 보면 볼 수록 이상한 것은 토토로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니메라는데  도대체 일본 사회는  토토로의 배경과 전혀 닮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30년  정도의 세월에 사회가 이렇게 황폐해 질 수 있었을까.  다시 <모노노케 희메>로 회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토로>와 <모노노케 희메>는 짝 영화 (conjugated movie;  내가 만든 용어.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니까. <토토로>는 즐겁고 <모노노케 희메>는 우울하다. <토토로>는 현대고 <모노노케 희메>는 원시다. <토토로>에서 숲의 원령은 인간이 도움을 요청하는 존재고 <모노노케 희메>에서 원령은 인간의 사냥감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절대 악인은 없으며 인간과 문명의 문제를 '원령'이라는 가장 일본적이면서  반문명적인 대상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토토로나 시시가미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사가 하나도 없다. 그들은 대상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줄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얼핏보면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등의 단어가 연상되지만 그 속에는 무엇보다도 "휴머니즘"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다. 이 영화들의 매력은  이러한 이중 구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계속되는 노파심 때문이지만 이런 영화들을 그냥 정령숭배 사상등으로 묶어서 비판해버려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JMS 때문에 조금 시끄러웠던 것 같다.  예전에 91년인가 92년도였던가. 서기연 친구들이 정말 목숨걸다시피하고 싸웠을 때, 그때도 "JMS 걔 들이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는 무얼 했는가"라는 자기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를 <토토로>를 보면서 알게 된다. 수 없이 반복해서 보아도 계속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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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시네마>(유미리 지음, 고려원)를 읽다.

먼저 딴소리 조금... 요즘 경기가 안좋아 지면서 출판사들도 예외 없이 흔들흔들 거리는 바람에 나같이 책을 사서보는 사람들은 적잖이 땡 잡았은게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엔 듣도보도 못한 출판사뿐만 아니라 문학과 지성사나 창비같은 출판사의 책들도 할인판매를 해대고 있으니 이젠 좋아만 할 일은 아닌가 싶다. 어쨌든 고려원의 왠만한 책은 3천원이면 살 수 있는데, 그래도 아직 3천원짜리 리스트에 없는 것들도 있나 보다. 내가 열심히 찾는 몇몇 책은 아직도 정가대로 판다는 걸 보니...

어쩌면 올 가을부터 1년간 일본에서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대해 아는 건 정말 없다. 일본어? 완전 깡통이다. 그저 내가 아는건 일본사람들은 영어를 못한다는 것(정말 일본 교수들은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라도 영어를 정말 못한다). 그리고 일본 소설 몇 개 읽은 것 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것들도 다 신통치 않다. 내가 보기엔 확 후려쳐서 모두 <상실의 시대>(조금 아는 척하면 <노르웨이의 숲> 이라고 해야겠지)와 비슷비슷하다. 유미리는 어떨까 하는 것이 내 관심사였다. 그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니까...

느낌을 말하자면 역시 비슷하다는 것. 어두운 골목길에서 빈 캔맥주를 다 빨아마셔버린 여자(또는 남자)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만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 때문인지 가족의 해체에 대한 노력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가족'이란 무얼까. 어떤이에겐 '가족'이 '보수주의'와 동의어일테고 어떤이에게 가족이란 '축복'일 수도 있다. 가족은 이기주의의 근원이기도하며 가족이란 이타주의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작년부터 '가족'이란 화두는 전세계적으로 다시 유행인 듯하다. <페이스 오프>의 성공으로 영화에서 가족애를 크게 다루는 경향이 보이더니, 점점 동성애라는 화두도 가부장제라는 또다른 가족으로 옮아간다. 이제 한국에서 한번 광풍이 몰아치려나. 그러고 보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외국것 베껴먹은 것일지라도 성적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보구나...

그래서 그런지 유미리를 통해 읽은 세상이 전혀 유쾌하지 않다. 한국의 신세대 작가(?)들에 대한 논의가 요즘 세간에 화제라는데 어쩌면 그런 경향을 일본과 함께 논의해봐야할 필요는 없을까? 빨리 '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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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다.

 작가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다.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작품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의 전자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통신 수단 광고가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운동과 스포츠는 과학만능주의를 선언한 지 오래다. 예술 문화 부분만 그러한가. 인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문학도 인문'과학'으로 과학에 스스로 흡수통합되어 버렸다. 사회과학, 교육과학, 생활과학 등등, 이제 '과학'은 모든 학문에 붙는 공통적인 접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국가에 경제위기가 닥쳐오니 모두가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어려운 경제위기를 풀기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하고 결국 외화획득에는 신기술에 의한 수출 증대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고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특혜'까지 주어가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낱말을 머리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대중들과 가깝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을 요약해서 인류 역사책에 한 줄로 적는다면 아마 복제양 '돌리'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조그만 양 한 마리가 사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된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우리귀에 들렸다. 하지만 '돌리'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에 왔던가.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수정란 분할 방법으로 복제 개구리(1952년), 복제 생쥐(1983년), 복제 송아지(1990년)를 만들어낸 전력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복제 기술의 발달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가. 그리고 어느 날 나타난 어린 양 '돌리'에게 경악하고 또한 박수를 보내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문화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의식과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주는가. 바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 매체(媒體, media)다.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리'는 전세계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양이 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대중 매체의 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각 종 대중 매체의 발전을 급속하게 촉진시켰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책에서 언론과 방송으로,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중 매체의 발달은, 금속활자가 위대한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쇄기구, 통신 장비등의 발달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이렇게 과학기술에 빚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서 과학기술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학술지를 통해 인정받고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학술지에 쓰이는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때문에 해석이 필요해졌다. 대중 매체가 바로 여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과학기술의 보도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정확한 사실 보도의 부재와 전망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이다.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외국 언론의 무분별한 인용보도와 전문학술지를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년 전만 해도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DHEA(dihydroepiandrosteron)의 경우가 그렇다. 96년 말 <뉴스위크>의 보도를 계기로 갑자기 불어온 DHEA는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으로,여성에서는 에스트로젠(esterogen)으로 바뀌는 전구물질(precursor)로서 몸안을 순환하는 가장 흔한 스테로이드 물질인데, 당시 한동안 정력제에서부터 항노화제, 항암제,심지어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1월 7일 프랑스 유력 시사주간지인 '르 포엥'에서 프랑스국립보건연구소 에티엔느 에밀 볼리외 교수팀에 의해 DHEA의 효능이 밝혀졌음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바 있다. 결국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과학기술 보도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학술 논문은 자신의 가설과 그것을 입증하는 결과들(results)로 나타난다. 때문에 이 결과들을 통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논문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비전공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있다. 논문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한채 몇몇 단어를 직역하다보면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지껏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는 항암제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 실험이 생체(in vivo) 실험인지 체외(in vitro) 실험인지, 사람 대상인지 쥐나 토끼의 대상실험인지, 전임상단계의 결과인지 임상 몇 상의 결과인지 등등, 오히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은 다 생략되거나 간단하게 압축하고 '획기적 치료제 개발'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등의 행태는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보도에 있어서는 정확한 사실의 보도와 조심스런 전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대중에게 꼭 과학기술을 알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기술관료(technocrat)'의 시대가 도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 간접적인 영행을 주고 있는 판국에, 사실상 대중들은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분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은 '전문가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대중화'를 통한 과학기술문화의 확립이다.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열린 전문가 집단으로, 소수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Posted by 바이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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