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 극장에 가서 <마더>를 보았다. 혼자 보니 더 무서웠다. 적당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훨씬 세다는 느낌이다. 제목만 보고 모성애를 기대하고 어머니와 함께 간 사람들에게는 대략난감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봉준호는 우리나라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겸비한, 스토리텔링이 가장 뛰어난 감독이라는 생각이다. 조금 길다 싶을 정도의 약간 지루할 수 있는 스토리이지만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것 저것 생각해볼 것들이 참으로 많다. 가족이라는 것, 모성이라는 것, 진실이라는 것, 상처라는 것, 집착이라는 것, 관계라는 것, 등등 할 이야기가 풍성한 영화다.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 이런 영화가 좋은 영화 아닌가!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풍부함
산동네 마을에 여고생이 살해되어 옥상 난간 위에 널린 채 발견된다. 용의자는 동네 바보 도준(원빈). 도준을 이용해먹는 친구 진태(진구)와 도준은 가벼운 교통사고가 난 후에 골프장에서 난동을 피웠는데 그 때 도준이 챙긴 골프공이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것이다. 동네 약재상을 운영하며 불법으로 침을 놓으면 살아가는 도준의 엄마 혜자(김혜자)는 도준이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들의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던 중 살해당한 여고생 문아정이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졌고 그 남자들의 사진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그 휴대폰을 찾는다. 휴대폰 속에는 동네 고물상 주인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었고 도준이 사건이 일어난 날 밤, 사건 장소에서 그 할아버지를 보았다는 기억을 되살려내자 혜자는 고물상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데, 거기서 그 할아버지로부터 범인이 오히려 도준임을 듣게 된다. 평소에는 순해도 바보라고 놀리는 사람에겐 참지말고 덤비라고 가르침을 받았던 도준이 문아정에게 돌을 던져 살해한 것. 그 사실을 알게된 혜자는 고물상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고물상에 불을 지른다.
한편 형사들은 문아정과 관련이 있는 남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동네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다운증후군 환자 종필의 옷에서 문아정의 혈흔을 발견하고 종필을 범인으로 구속한 후 도준을 석방한다. 혜자는 종필을 면회하러 가서 "엄마는 있니?"라면서 통곡한다. 혜자가 동네 아줌마들과 효도관광을 떠나는 날, 도준이 불타버린 고물상에서 혜자의 침통을 주웠다며 엄마에게 침통을 돌려주자 혜자는 버스 안에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침 자리 (허벅지)에 침을 놓고 함께 관광버스 춤을 춘다.
일단 이 영화의 마무리는 박찬욱의 <올드보이>를 연상케 한다. 올드 보이가 최면술을 이용해서 망각을 시도한다면 <마더>는 침을 통해서 망각을 시도한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망각이 제대로 되었는지 아닌지 불확실하게 끝나는데 <올드보이>의 흰 눈밭 장면도 멋있었지만 <마더>의 석양 속 관광버스 춤 장면은 참 뛰어난 장면이지 싶다. 모든 과거가 하나로 뒤섞여 버리는 느낌을 달리는 버스 속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형상화시켜 찍은 느낌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대로 이 영화는 김혜자를 위한 영화다. 그러나 연기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새롭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익숙한 배우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작과 마지막 부분의 갈대밭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추는 춤은 (그 의미는 잘 와닿지 않지만) 뭔가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 영화 속 혜자는 어려서 도준과 함께 자살을 기도했었고 그래서 박카스에 농약을 타서 먹였던 전력이 있는데, 아마 본인도 마셨을 것이고 그래서 아들만 바보가 된 것이 아니라 혜자 자신도 약간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때문에 아들에게 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엄마가 보여주는 모습은 모성이라기 보다는 집착에 가깝다. 이미 전작들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을 잘 담아낸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리워진 집착, 진실마저도 덮어버리는 집착, 그 집착으로 인한 상처와 회한을 유례없이 어두운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요즘 더 어두워져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탓일까? 백수 시간강사의 지난한 삶을 그린 <플란더스의 개>, 추악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괴물에 납치되어 희생된 가족의 이야기였던 <괴물>에서도 나름 유머러스 하고 밝게 유지되어왔던 감독의 시선이 유달리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