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삼성의 이상민 선수가 은퇴를 하면서 팬들이 은퇴회견장에서 울고 불고 만류를 했더군요. 무려 9년 연속으로 올스타 팬투표에서 1위를 할 정도의 인기최강을 달린 이상민 선수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죠. 과거 농구대잔치 시절, 농구선수들의 인기를 생각해보면 저 정도는 약과다 싶지만 사실 아직도 저런 팬들을 몰고 다닌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합니다. 180 cm 조금 넘는 자그마한 키에 덩크슛을 시도하던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생각이 나네요. 1990년대 초반, 강호에는 대학팀들이 형님들을 제압하기 시작하고 <슬램 덩크> 강백호와 서태웅이 뭇 사람들의 혼을 빼놓던 시절...
슬램덩크 9분만에 복습하는 감동적인 동영상
때는 바야흐로 이충희의 현대와 김현준의 삼성 양강체제가 붕괴한 후 허동택과 한기범의 기아가 실업리그를 자기들 맘대로 쥐락펴락 하던 시절, 강
대학 입학도 하기 전에 출전해서 어시스트 1위한 이상민(경향신문 1991.03.09)
호에서 뛰어 놀던 어린 아해들이 슬슬 선배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선봉이 연세대 농구부였습니다.
특히 서장훈을 앞에 두고도 덩크슛을 할 정도의 파워를 가진 88학번 정재근, 대학 최고 가드로 졸업할 때 삼성과 SBS 스카우트 파동으로 제명까지 당했던 89학번 오성식, 누가 뭐래도 이충희, 김현준의 뒤를 이을 최고 슈터로 주목받던 90학번 문경은이 가세하면서 연세대 농구부의 위력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을 한 것이 바로 91학번 컴퓨터 가드 이상민의 가세입니다.
전통의 용산고, 우지원, 전희철의 경복고, 서장훈의 휘문고를 제치고 홍대부고 전성시대를 열었던 이상민은 연세대에 입학하기도 전에 연세대 유니폼을 입고 90-91년 농구대잔치 2차대회부터 화려하게 등장하여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농구대잔치 어시스트 1위를 하기에 이릅니다.
이상민의 등장으로 정재근, 김재훈의 투 톱에, 오성식, 이상민의 가드진, 그리고 슈터 문경은, 식스맨 이상범으로 구성된 연세대 농구부의 짜임새는 실업팀들을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결국 연세대가 기아를 꺾는 날이 오고야 말았으니 그게 바로 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하는 1991년 11월 농구대잔치 경기입니다.
이 경기의 백미는 75대 75 동점에서 8초를 남기고 공격권을 쥔 연세대가 현 KT&G 감독인 이상범의 버저비터로 기아를 꺾는 순간이었습니다. 기아의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첫번째 신호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최희암 감독의 작전지시에 따라 이상범이 좌측 45도 각도에서 마지막 슛을 던지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경향신문 1991년 11월 17일 신문기사
하지만 연세대가 가끔 기아를 비롯한 실업팀들을 이기긴 했어도 허동택과 한기범의 기아에겐 역부족이었죠. 그러다가 92년 우지원, 김훈, 석주일 3총사가 들어오고 93년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농구의 최대어 서장훈이 연세대에 가세하면서 연세대 농구부는 정점을 찍습니다. 소위 독수리 5형제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뿐만 아니라 후보선수 하나 하나까지 유명세를 탔던 시절이었죠. 비단 연세대 뿐만 아니라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의 고려대도, 김영만, 양경민, 정경호의 중앙대도, 강혁, 김성철 등의 선수보다 인기가 있었던 홍금보 최부영 감독의 경희대도 오빠부대가 있었죠. 그리고 그 시절 있었던 또 하나의 명승부는 아래의 경기입니다.
94-95년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우승팀을 가리는 마지막 경기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연고전. 12승 전승의 연세대와 11승 1패의 고려대의 최종전이었습니다. 경기는 중간에 고대가 잠시 따라잡았지만 다시 연대가 힘을 내면서 후반 1분 10초를 앞두고 연세대의 8점차 리드. 그냥 그렇게 끝나려나 했는데 이상민이 리바운드를 다투다 그라운드에 쓰러지고 맙니다. 불의의 무릎부상, 결국 이상민이 빠진 연세대는 전희철에게 연속득점을 허용하고 눈감고도 자유투를 넣는다는 우지원의 자유투 실수까지 이어지면서 동점을 허용합니다. 마지막 공격권을 쥔 연대의 우지원이 던진 슛이 림을 벗어나는 순간 리바운드 볼을 다투던 중 공격권은 연대에게 주어지고 남은 시간은 4초. 최희암 감독은 장훈이에게 주라고 지시를 하고 자신의 마크맨 현주엽이 5반칙으로 빠져서 수비가 느슨해진 서장훈은 버저비터를 꽂아 넣습니다. 이 경기는 이상민 선수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준 경기였죠.
이렇게 가까스로 13전 전승으로 올라간 연세대는 삼성전자의 폭력농구(?)에 부상병동으로 전락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합니다. 이상민, 김훈의 부상 결장 속에서도 모든 선수들이 분전했지만 삼성 박상관에게 팔꿈치로 찍혀서(고의라고 보긴 애매합니다) 서장훈이 실려나가고 (서장훈은 아직도 목보호대를 착용하죠) 대신 분전하던 1학년 구본근은 호흡 이상으로 실신하여 실려나가고 말죠. 강백호 닮았다던 어린 김택훈이 분전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컴퓨터 가드 이상민은 국내 스포츠 사상 최고액의 계약으로 현대전자에 입단합니다.
동아일보 1993.12.22
그 후 프로농구가 시작되었고 한시즌에 몇 개 볼까 말까 했던 덩크슛이 외국인 선수들에 의해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게 되었지만 농구에 대한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년 선배인 문경은, 1년 후배인 우지원 모두 은퇴의 기로에 서 있고 서장훈만 외로이 고목이 되어 남은 느낌을 주는 이상민의 은퇴는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네요. 그래도 옛추억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디서든 건승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