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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동 정육점

바이오매니아 1999. 11.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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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동 정육점>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고 '삼양동(三陽洞)'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노랑머리>라는 저예산 영화의 희망이라고도 하고, 쓸데없이 벗는 준포르노라고도 하는 영화나 그 제작사에도 관심이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명했고 내가 조금 큰 다음에는 북한에서 탈출을 했다든지 아니면 북한에서 사기치고 도망을 왔다든지 소문이 돌았던 신상옥 감독의 아들에게도 관심이 없으며, 이 영화가 개봉해서 흥행을 할지 아니면 적어도 정말 저예산 영화의 한줄기 햇빛이 되어줄 지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아울러 이 영화의 스토리나 연극 배우출신의 무명연기자들에게도 미안하지만 큰 관심이 없다. 게다가 식탐이 있을 정도로 '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지만 결코 '정육점'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오직 "삼양동"이라는 제목을 보고 몰래 도둑질을 하다 남 모르는 사이에 누구엔가 들킨 듯이 놀랐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행정구역상에도 없는 "삼양동"이라는 지명을 들먹거려 영화를 만들었나에만 관심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의 모든 것들은 내가 자라온 '행정구역상에 없는 서울의 한 동네'인 "삼양동"에 대한 내 생각이든지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뿐이다.

나는 우리나이로 서른 하나. 곧 서른 둘이 된다. 결혼해서 1년 잠시 나가 산 것과 지금 일본에 나와 있는 것을 제외하곤 약 30년 동안 삼양동에 살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살 것이다. 나는 정말로 왕년에 공동묘지였던 곳에 세워진 '삼양'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 때 '삼양'교회를 처음 다녔으며 '삼양'슈퍼에서 주로 군것질 거리를 사먹었다. 어린 내가 그 많은 만화영화와 성룡이 나오던 홍콩 무술영화를 주로 보러 다니던 극장도 '삼양'극장이었고 우리집에 오려면 '삼양'사거리에서 부터 설명을 해야만 했다. 국민학교 이름을 이야기하면 "삼양라면"회사에서 만들었냐는 소리는 거의 빠짐 없이 나왔으며 급식으로 삼양라면이 나오지 않냐느니, 삼양라면 공장이 있냐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삼양동이 왜 삼양동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예전에 못사는 세 군데 판자촌의 '양동'사람들을 이주시켰기, 또는 그들이 이주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삼각산 줄기의 볕이 잘드는 동네라서 그렇다고도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줄기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자 같기도 하고, 예전엔 정말 모두 공동묘지였다는 것으로 보아선 전자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앞서 이야기한대로 삼양동은 행정구역에 없다. 60년대까지는 삼양동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 삼양동이란 미아 1, 2, 6, 7동의 산동네를 이름이다. 우리집 주소는 791번지 21XX호이다. 하나의 번지에 21XX번째 집이라는 의미다. 아직까지 이런 주소를 가진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3천호도 있으니까. 791번지는 미아 1, 2, 7동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동이름은 다른데 번지수는 같은 희한한 일이다. 이는 서울에 대표적인 달동네인 봉천동과 맞먹는다. 봉천동이 TV 드라마 '인간 시장'이나 '서울의 달'로 유명했다면 삼양동은 '어둠의 자식들'로 유명했다. <어둠의 자식들>의 저자이자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인공인 이동철은 5공 말기 6공초 우리 동네 국회의원 (본명 이철용)이었다. 당시 전라도 농촌 어느 지역에서 국민학교 중퇴 학력의 의원이 당선되는 바람에 영예의 1등을 놓쳤지만, 이철용씨도 국졸로서 의원 중에 최저에서 두번째의 학력이다. 빈민운동가 출신에 장애인이었던 그는, 봉고차를 타고 다니고, 전두환이 국회에서 증언인지 사죄인지를 한답시고 어느 해 12월 31일 누눈가가 써준 것이 틀림 없을 모범답안을 읽을 때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서 끌려 나갔던 전력의 인물이다. 그가 선거에서 맞붙어 싸웠던 인물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유명하다는 대학 정치학박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출신의 배 머시기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배머시기는 4등 밖에 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일보엔 한국최고의 학벌과 최저의 학벌이 싸워 그가 이겼다는, 어쩌면 개천에서 용낫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기사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도 삼양동을 벗어날 절호의 찬스가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시절.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죽거리 좀 못가서 논현동이라는 곳으로 이사가자고 말씀을 하셨다. 전학이니 이사니 이런 것을 좋아할 리 없었던 어린 시절, 나는 거의 단식 투쟁 비슷하게 울고 불고 해서 그 이사를 좌절시켰다. 아직도 이런 달동네에 사는 건 네 놈이 그 때 이사를 안 간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그런 거야, 라는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잘 한 결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 당시 배나무 밭이 펼쳐져 있던 논현동은 지금 누구나 다 알듯이 서울에서 상당한 부촌이 되어 있다. 당연히 집값은 지금 우리집의 5배는 될 것이고. 하지만 나는 그런 계산보다는 삼양동이라는 환경이 나에게 준 영향을 더 감사하고 있다.

삼양동은 달동네(였?)다. 국민학교 때는 우리 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사는 어떤 화가라는 인간이 돈 벌어오라고 지 아들을 때려 애가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없어서인지 언제나 얼굴에 핏기가 없었던 국민학교 1학년 짜리 그 녀석은 어느날 부터 보이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는 통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우리 뒷골목에는 소위 결손 가정이랄까, 할머니와 고모랑 같이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주 순한 녀석이었지만 그 녀석 할머니가 어찌나 그 녀석을 위하셨는지 솔직히 우리는 그 녀석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결국 그 순했던 친구도 고3 끝에 가서 '강간 미수'로 퇴학을 당했고, 우스운 일이지만 덕분에 나는 내신 등급이 하나 내려갔다. 5만원인지 10만원인지만 가져가면 그 등급 다시 올릴 수 있다는 어떤 친구 엄마의 말을 들었지만 돈이 아까우셨는지, 돈이 없었는지, 아니면 그게 무슨 대수라고 생각하셨는지 어머니는 그냥 무시해버리셨다고 한다. 하긴 대학 입시날도 한 번도 학교까지, 당시 우리는 대학에서 시험을 봤다, 오시지 않았던 전력의 부모님들로서는 그냥 '실력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튼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똑순이 김민희와 빨간 피터 추송웅씨가 나왔던 그 드라마 <달동네>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저게 우리 동네 같은 곳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에 그 많은 봉제 공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가정집의 미싱들이지만)들을 보고 미싱 바늘을 가지고 놀았음에도 나는 박중훈이 <우묵배미의 사랑>에 출현하기 위해 삼양동 미싱 공장에서 연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삼양동이 대한민국 최고의 가내 봉제업 동네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내가 삼양동을 깨달은 것은 중학 때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삼양동 아이들이 반, 성북동/명륜동 아이들이 반이었다. 다는 아니지만 삼양동 아이들은 대체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공부도 처지는 쪽이었고, 잘 알듯이 서울의 부촌인 성북동/명륜동 아이들은 깨끗하고 "쩨"를 입고 다니고 공부도 잘 했다. 어느 8학군 출신의 사람이 놀랐던 일이지만 우리 중학교에선 70명 한 반에 보통 35명이 인문계 주간에 진학을 했는데, 삼양동으로 대변되는 도봉구 아이들의 진학률은 상당히 낮지 않았다 싶다. 어느 선생님은 아예 대놓고 삼양동 아이들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버스 회수권을 걷어 생활보호대상자(삼양동에 사는 애들이 대부분인 것을 말해 무얼 할까)들에게 나눠주었다가 애들이 받지 않겠다고, 우리가 거지냐고 울어버린 기억도 난다. 그게 그 선생님 딴에는 좋은 의미에서 한 일이었을 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삼양동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이전에는 삼양동에 사는 사람치고는 부족함이 없이 살다가 작은아버지 사업 보증으로 집과 전 재산을 허공에 날려버린 우리 가족도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였기에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가 아는 것만도 참 많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린 자식들에게 쉬쉬하면서도 그랬으니 그 맘 고생은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아픈 일이다. 하나에 500원 남는 참기름 장사를 하시느라 그 무거운 참기름 병을 들고 전 서울을 누비신 어머니에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비어있는 집에 대해 투정을 했었다. 언젠가는 차비가 없어 학교에 못갈 뻔하다가 어머니가 동네 쌀집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빌려 오셔서, 또 그걸 바꾸러 다니느라고 그 아침에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지각을 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중 고등학교 때 내 사진 보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그 당시 나의 복장은 대부분 어른들의 '기지 바지'였다. 매년 쑥쑥 자라는 나를 감당하지도 못하고 돈도 없었던 어머니가 친척 어른들의 낡은 양복바지를 얻어다 입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등학교 때 어느 놈은 나를 '이모부 바지'라고 불렀다. 내 옷이 대부분 이모부 것들이었으니까. 참고로 나는 이모부가 세 분이나 계신다. 그 때부터는 조금씩 사회라는 곳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러니가 하나 있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김민기를 너무 좋아했다. 당시엔 김민기의 노래는 거의 대부분 금지곡이었다. 지금은 모 대학 교수님이 된 김창남씨의 <김민기>라는 책을 사서 혼자서 기타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런데 김민기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시간이었다. 우리 중학교는 여자 선생님이 다해야 다섯 손가락 안쪽으로 아주 드문데 새로 여자 음악 선생님이 오신 것이다. 그 여자 선생님과 어느 지방에서 전학을 온 맹랑한 녀석, 이렇게 둘이 나에게 김민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 맹랑한 녀석은 거의 만능인간으로서 공부는 물론 농구도 노래도 아주 잘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소위 삼양동도 성북동도 아닌 '여의도'에 사는 녀석이었다. 어느 날 그 음악 선생님이 녀석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켰는데 그 녀석이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아주 단조로운 멜로디의 곡이었는데 얼마 안 가 선생님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돌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런 노래 어디서 배웠냐느니, 음악시간에 가요를 부른다느니 해가면서 한 쪽 다리 들고 의자를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드는 최고급 난이도의 형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곡은 김민기의 "친구"라는 곡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가 5공의 딱 중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다. 하여튼 그 와중에도 히죽거리며 벌을 받았던 그 녀석은 곧 강남의 농구대가 있는 상아아파트(왜 이런 아파트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까?)로 이사를 갔고 (녀석이 우리 학교에 전학을 온 것은 강남 8학군 중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즉 녀석은 대기자였다) 우리는 농구공을 들고 친히 그 먼 곳으로 농구 원정을 다녔다. 농구대가 있는 곳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그리고 녀석은 그 다음해 본래 가려던 강남의 중학으로 전학을 갔다. 하여튼 김민기라는 사람은 아직도 내겐 하나의 '상징'이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민기는 미대 출신이다. 어느 날 그가 석양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고깃배를 바라보며 멋있다고 감탄을 하자 그 옆의 어느 사람이 "저 사람들에겐 저게 얼마나 큰 노동인지 아느냐"고 쏘아붙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민기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대학 시절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면 집이 어디냐고 묻는데 '삼양동'이러면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러면 나는 그게 행정구역에 없거든, 하면서 미아1동 또는 미아리 고개 넘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왠지 킥킥거리면서 미국의 "텍사스" 얘길 꺼내곤 했다. 사실 삼양동은 미아리 텍사스와는 좀 떨어져 있다. 우스갯 소리지만 미아리 텍사스엔 지하철이 가지만 삼양동엔 지하철이(또는 지하철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삼양동은 미아리 텍사스에서 버스타고 10분 정도'라고 이야기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 듣는다. 실은 나도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독서실이 텍사스 맞은편에 있어서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망원경으로 그 동네를 넘겨다 본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높은 울타리가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삼양동은 텍사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텍사스보다 좋다는 것도, 그렇다고 텍사스가 뭐가 나쁘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삼양동은 텍사스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어떤 과선배가 취미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뭐 별다른 것이 없었던 나는 독서라고 대답을 했고, 누구를 좋아하냐고, 역시 별 생각이 없던 나는 당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이문열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다짜고짜 "이문열 그런 새끼는 죽여버려야 하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그 선배는 약간의 "운동권"비슷한 이미지였는데-물론 진짜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내겐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들의 명분과 주장에 대해 크게 반대해 본 적은 없지만, "4천만 민중"의 이름으로 내거는 그들의 자보와 행동들이 내겐, 내가 "삼양동"에 살았기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릇된 생각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학생 때는 실력을 키워 나중에 우리가 기성세대가 된 다음에 그 이상을 펼쳐 보이자는 그 과대망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생각도 한 적이 없다.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예전에 내가 속해있는 기독교단체의 어떤 간사님 동생이 우리학교 같은 학번 학생이었다. 91년 강경대군 치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연쇄적인 분신사건이 일어난 지 좀 지나서, 그 당시 그 간사님 동생이, 우리가 모임을 하는데 그 문 밖에 "노동자 농민을 다 죽이는 이 정권하"에서 우리의 "기쁜 노래소리"를 책망하는 쪽지를 붙여 놓았던 적이 있다. 그건 완전히 그 친구의 오해였다고, 당시 시위라든지 이런 저런 일에 그 친구처럼 나서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단체의 깃발을 들고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강경대군이 처음 실려온 세브란스 영안실의 시신 옆에 망을 봤던 두 사람 중의 한사람은 당시 다른 기독단체 사람이었고, 그 당시 학내 기독교단체들 사이에도 많은 의견이 나누어졌고 서로 논쟁도 상당히 있었다. 비록 행동통일을 완전히 이루진 못했어도 시위 중에 만난 "형제, 자매"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고, 당시 회장이던 내가 총무였던 후배 녀석을 시위대 속에서 만나 그냥 희미하게 웃었던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변명하고도 싶었다. 그 간사님 동생인,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대학 동창 친구는 그 후에 "현장활동"을 한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6년이나 전 이야기다. 어쨌든 그 친구의 '메모'는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어디 그렇다면 누가 더 평생 그렇게 민중을 위해 사나 두고 보자, 라는 약간의 치기도 있었다. 지금은 그냥 그것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아주 가끔 나는 그 팬시점 분위기의 작은 편지지에 얇은 파란색 매직과 검은 볼펜으로 씌어진 그 글을 읽곤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나는 내가 단지 "삼양동"이라는 달동네에 산다는 것으로 나를 자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단지 내가 달동네에 산다는 것만으로 내가 민중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래도 우리집이 있는 쪽은 그렇게 판자촌이진 않고 게다가 우리는 '지주'아닌가. 하여튼 아직도 나는 이런 사회정의나 분배문제에 대해선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냥 그들과 '같이 사는 것' 뿐이 아닌가 싶다. 옆집에 누가 세들어 사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평등"이나 "더불어 삶" 같은 것은 많이 잊혀지는 듯하다. 그 덕분인지 적어도 내가 알기론 '날라리들의 대변자'같았던, 야한 여자를 좋아하던 마 무슨 교수님은 이제 진보인사이자 자유의 대변자 내지 수호자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런 것을 격세지감이라고 하는 것일까.

삼양동에 사는 것은 괴롭다. 중학교 때부터 지하철 공사로 그 다음엔 미아로 확장공사 그 다음엔 도시순환고속도로인가로, 지금은 재개발로 언제나 공사중이다. 지하철이 안 닿아서 불편한 것은 그렇다 치고 IMF 이전엔 교통체증이 심해서 택시들도 안 간다고 하는 곳이다. 사람은 그리 많이 사는데 근처에 중 고등학교도 별로 없어서 나는 매일 40분 이상 버스 타고 학교엘 다녔고 고등학교는 그나마 한번에 가는 것도 없어 갈아타야만 했다. 밤늦은 시간에 술먹고 싸우는 인간들의 악다구니 듣는 것도, 지저분하고 꽉막힌 시장통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도 유쾌하진 않다. 게다가 요즘은 많이 줄은 것 같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깡패들의 패싸움, 칼부림이라든지 소위 100번지, 또는 빡빡산을 근거로한 "쌍칼"이나 "은행나무파"등 무협지류의 불량배들은 아주 혐오스럽다. 비록 아내에겐 이런 게 '인간사는 곳'이라고 이야긴 하지만. 만약 맹자의 어머니라면 이런 곳에서는 또 한 번 이사를 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세월과 함께 삼양동도 이제 바뀌어가고 있다. 몇년전에는 주차 공간 부족으로 <카메라출동>에 나왔다더니 요즘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철거된 집들의 세입자대책위원회에서 확성기로 들려주던, 1년 가까이 24시간 계속되었던 <산자여 따르라>류의 민중가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집이 그 재개발 대상에 끼지 않은 것이 다행일까? 세입자와 집주인간의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왠지 집주인 입장에 서고 싶지는 않다. 우리집엔 우리 부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세입자다. 허튼 생각이지만 만일 모든 집에 자기 자식들이 세를 들어 산다면 세입자의 입장을 집주인들이 대변해 주지 않을까? 하여튼 삼양동은 그 모양에 있어서만큼은 바뀌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안바뀌고 있는 것도 있다. 바로 동네 사람들이다. 한 집에서 30년이 넘게 산 우리 가족이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집 골목, 뒷골목에 있는 집주인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그대로 살고 있다. 달동네 집 팔아야 다른 동네 집 살 수도 없으니 그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또한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그 집들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우리집에도 세들어 살던 사람들이 참 많이 바뀌었다. 도둑놈이 세들어 산 적도 있고 (이사가고 경찰이 찾아왔다) 별의 별 인간들이 다 있었다. 그리고 남의 집에 세들어 살던 내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다. 처음엔 근처 동네로 갔다가 좀 더 외곽으로 갔다가 이젠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서울의 달동네에서 마저 쫓겨나 서울 바깥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삼양동도 바뀌어 간다.

그래도 나는 삼양동에 고마워한다. 어려서 아동 학대를 당한 사람이 나중에 부모가 되면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의 부모처럼 자신도 아동 학대를 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녀에게 너무너무 잘하는 부모가 되는 경우란다. 나는 그게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삼양동에 감사하는 것은 내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는, 산상수훈의 첫 마디는 내 신앙의 뿌리이기도 하다. 아직 일천한 사회경험일지라도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돈의 액수가 내게 판단기준이 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뭔가 보람있는 일은 없을까.

199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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