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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매니아 in 언론/과학오디세이(경향신문)

[경향신문 과학오디세이] 점수 공화국

바이오매니아 2012. 7. 8. 19:15

이번 경향신문 과학오디세이 칼럼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작게는 과학계와 학계, 크게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제목을 "죽음의 점수판을 걷어치워라"라고 하려다가 너무 길기도 하고 다른 칼럼의 패러디이기도 해서 "점수공화국"으로 바꿨습니다. 


이 주제를 다룬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의 온갖 점수와 평가 제도가 역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입니다. 특히 리더십이 없는 리더들이 사람들이 잘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점수제를 만들어 사람들을 다루려는 현상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아무리 상담을 해도 점수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점수를 따라갈 수가 없고, 실제로 뭔가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살기 위해 약삭빠른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특히 요즘 신임 연구자들이나 신임 교수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노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놀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업무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죠. 그런데 그들에게 지원은 거의 안해주면서 선배들이 세월 좋을 때 농땡이 친 덕에 만들어놓은 쓸데없는 조항들로 목을 조르고 있는 형국이죠. 그러니 모두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연구건 교육이건 행복해 하면서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선 뭔가 사회적 신뢰와 평가의 방법들이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경향신문 과학오디세이] 점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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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생명공학연구원 원장님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실적의 중압감은 모두가 느끼는 고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와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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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오디세이]‘점수 공화국’

꺼내면 싸움 나는 주제들이 있다. 선동열이냐 박찬호냐,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뭐 이런 것들이다. 그래도 동일 종목은 통계 지표라도 있지, 야구냐 축구냐, 김연아냐 박태환이냐, 뭐 이렇게 붙여놓으면 이건 그냥 싸우자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평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한정된 연구비를 항암제 개발에 줄 것인가,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줄 것인가 선택해야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재화는 유한하고 경쟁은 무한하다. 

평가는 어렵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평가는 불가피하다. 다른 분야도 비슷하겠지만 과학기술 분야는 평가의 전쟁터다. 연구자 개인의 업적 평가부터 연구 과제의 평가까지, 평가받고 평가하는 것은 연구자의 일상이다. 선정평가, 중간평가, 연차평가, 최종평가 등등 연구자의 달력은 평가 일정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공정한 평가는 평가하는 쪽과 평가받는 쪽 모두에게 큰 관심사다. 평가는 양적 평가와 질적 평가로 나뉘는데 특히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질적 평가다. 질적 평가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한다고 해도 평가자의 주관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평가기관들이 골치를 앓고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객관적 점수화를 시도해왔다.

연구 논문의 질적 평가에 가장 흔히 사용되는 척도가 톰슨 로이터사에서 제공하는 과학인용색인(Science citation index·SCI) 저널의 피인용지수(Impact Factor)이다. 피인용지수란 그 저널에 실린 논문들이 다른 논문에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가를 수치적으로 나타낸 것인데 이 방식에 따르면 많이 인용될수록 좋은 논문이 되고 좋은 저널이 된다. 즉 저널의 수준으로 논문의 수준을 평가하는 방식인 것이다. 

출신 학교의 수준에 따라 한 사람의 수준을 판단한다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터이지만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이 방식은 널리 통용되고 있다. 분야에 따라 크게 불리한 측면이 있는 등 여러 가지 허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엔 국내 학술단체가 발간하는 학술지를 대상으로 소위 ‘한국형 SCI’인 한국학술지인용색인(Korea Citation Index·KCI)도 만들어져 평가의 기준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 논문만이 연구자의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논문 외에도 저서, 학회 발표, 특허, 산학협력 실적, 기술이전료, 외부 프로젝트 수주 등 연구자를 평가하는 다양한 항목들이 있고 이 모든 것을 만족시켜야 훌륭한 연구자다. 연구자가 혼자 연구실에 처박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게다가 대학교수들은 연구 이외에 교육과 봉사라는 또 다른 기준으로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 교육 지표의 경우는 학생들에 의한 강의 평가, 담당 과목 학점 수, 학생 상담 실적, 심지어 교수 연수 참석 횟수까지 항목이 수십 가지다. 봉사는 또 어떤가. 학내 보직, 학회 보직, 교내외 각종 위원회, 심사위원, 방송 출연, 언론 기고 등등 그 항목도 만만치 않다. 이 칼럼도 내 봉사 점수의 일부이다.

최근 병원 의사들의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제 논란이 있었다. 이런 제도가 생기면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될 수도 있지만 실적을 올리기 위한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주객이 전도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연구자, 대학교수, 의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학교 선생님들도 비슷한 상황이고 공무원, 심지어 군인들까지도 온갖 점수를 따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점수제가 공정한 평가를 통해 유능한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고, 나태하고 무능한 사람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점수를 따기 위해 자기 반 학생들 성적을 관리하고, 불필요한 책을 쓰고, 부하에게 쓴소리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연수에 들어가 앉아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신임 연구자들이나 신임 교수들에게 이런 점수제는 매우 가혹하다. 이 때문에 최근 임용된 연구자들을 보면 안쓰럽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년이 넘게 연구에만 몰두하다 어렵게 직장을 잡아 이제야 자신의 꿈을 펼쳐보려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해주기는커녕 수십 가지 항목을 들이대며 이 점수 못 따면 낙오된다며 옥죄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선배들의 나태함으로 생긴 수많은 조항들이 후배의 목을 죄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렇다고 평가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위한 평가인지, 점수에 얽매어 본질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때로는 죽음의 점수판을 걷어치우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이한승 | 신라대 교수·바이오식품소재학>

입력 : 2012-07-08 21:20:19수정 : 2012-07-08 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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