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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회를 원하신다면 <개념의료>를 읽어보세요.

바이오매니아 2013. 11. 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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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념의료>(박재영, 청년의사>를 읽었습니다. 팟캐스트 "나는 의사다" 47회에서 흥미롭게 들었던 내용인데 여차 여차하여 감사하게도 책을 얻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의료 문제를 간명하고 쉽게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도 돋보이고 여러가지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저자 사인은 자랑! (그런데 손글씨가 정말 예술이십니다.)

이 책의 부제는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병원에 자주 가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지만 솔직히 저는 병원에 간다고 그다지 화가 나진 않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의료 수준과 시스템은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족한 점도 있겠죠. 예를 들면 '친절' 같은 것이요. 하지만 요즘은 우리나라 병의원도 많이 친절해진 느낌입니다. 

예전에 일본에 살 때 제가 아는 분 아기가 심장 수술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동경대 병원과 서울대 병원의 차이를 말씀하시면서 한탄(?)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서울대 병원에선 검사하는 중에 아기가 울면 엄마에게 가만 있지 말고 아기가 울지 못하도록 하라고 의사가 짜증을 냈는데 동경대 병원에선 여러 의사와 간호사들이 장난감 등을 들고 달려 들어 아기를 얼르고 달래며 검사를 받았다는,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10여년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린 아기들은 수술하는데 돈도 거의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 온 아기인데도 말이죠. 

하지만 (당시로선) 우리보다 훨씬 잘 살던 소위 '선진국' 일본과 우리나라를 그냥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그리고 저는 친절, 소통, 공감 뭐 이런 것보다 필요할 때 병원에 가서 잘 치료받을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는 미국이 적절할 지 모르겠군요. 요즘 오바마케어로 시끄럽던데 미국과 같은 의료 시스템은 정말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미국 이민가신 한 친척분은 배우자가 암에 걸렸는데 보험이 없어서 2년 넘게 투병하시면서 재산 다 날리고 개인 파산을 신청하셨더군요. 뭐 영화 <식코>에서 잘 보여줍니다만 미국 의료는 정말 심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국내에도 낙후되거나 의료 서비스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있을 것이고 중병이나 희귀병에 걸렸을 때의 어려움 등도 있겠지만 적어도 의료 접근성과 의료 수준에서 이 정도면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건 제 개인 경험과 좁은 안목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개념의료>를 읽게 되면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 속에 여러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이렇습니다. 

"최소한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런 경향이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의료대란이 남긴 가장 큰 후유증은 상호 불신이었다. 의사와 정부는 전혀 상대방을 믿지 않는다. 국민들은 의사도 믿지 않고 정부도 믿지 않는다. 정부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지만 성적이 안 오르는 학생처럼, 적지 않은 득점에도 불구하고 실점이 너무 많다. 그런 와중에 사회는 고령화되고 의료비는 증가하고 복지 수요도 늘어난다."

아마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의사가 바라보는 의료계, 국민이 바라보는 의료계를 양쪽의 시작에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 본인이 의사이면서 의사가 아닌 위치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언론인이자 저술가로서 이 문제에 대한 수 많은 데이터와 자료들을 꾸준히 정리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거기에 더 놀라운 것은 마냥 양비론처럼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과거 의약분업으로 인한 갈등이 심했던 시절이 아마 의료 문제의 정점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제가 당시 제일 놀랐던 것은 의료계 상황보다 의사들의 "의식" 또는 "인식"이었습니다. 이게 사실 꼭 의사 뿐만 아니라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나 교수 등의 집단에서도 자주 보이는 것인데, 그걸 꼭 "특권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도 가끔 여기저기서 보거나 듣는 의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들 때문에 조금씩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역사적 맥락에서 그걸 좀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한국 의료의 현재, 2부는 한국 의료의 발전 과정, 3부는 한국 의료의 향후 발전 과제입니다. 개인적으로 2부에서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냥 대통령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대에 만들어진 시스템이 대통령을 우습게 보는 이 시대에 어떻게 조정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구요. 

이러한 의료 문제에 대한 저자인 박재영 선생님이 맨 마지막에 제언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민국은 더 건강해져야 한다. 더 건강해질 수 있다.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개념 있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하고, 개념 있는 시민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런 국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개념 있는 의료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가 공동체의식이라는 근육을 얼마나 열심히 단련하느냐에 따라 그 성과가 달려 있다." 

간단히 줄이자면 개념 있는 의사, 개념 있는 시민, 개념 있는 의료정책, 그리고 공동체의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저 이야기에 100% 동의하지만,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 능력이나 방식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저로서는 과연 어떻게 의사와 시민이 개념을 키울 수 있을지, 게다가 점점 허물어져 가는 공동체의식을 어떻게 단련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개념을 갖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회 문제를 다각도로 다뤘지만 생각보다 쉽고 잘 읽힙니다. 건강한 사회에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강추합니다.  


덧붙임 1. 흥미로운 부분 몇 군데만 인용하자면

- 거의 모든 수술이 미국에서 가장 흔히 행해진다. 하지만 맹장 수술만은 독일에서 가장 많이 행해진다. 독일 의사들은 강심제를 영국 의사들보다 6-7배 더 많이 처방하는 대신 항생제는 훨씬 적게 쓴다. 프랑스 의사들은 좌약을 미국 의사들보다 7배 더 자주 처방한다. 31쪽

부작용은 不나 否가 아니라 副작용으로 부수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중략) 부회장이나 부사장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느낌이 없는 것처럼 부작용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특별히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것은 아니다. 부작용 중에서 부정적인 것이면서 그 정도가 비교적 심한 경우를 지칭할 때는 역작용(adverse effect)라고 한다.(중략) 사실 부작용이 없는 약은 단 한 개도 없다. 다만 부작용보다 작용이 훨씬 크기 때문에 약이 될 뿐이다. 39쪽

- 의료는 문화다. (중략) 흔히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외국의 단편적인 사례들을 거론하며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몇몇 나라가 채택하여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가 그 제도를 도입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외국의 사례를 참고할 때에는 그 나라의 문화적 맥락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40쪽

- 1840년 오스트리아의 의사 제멜바이스가 아이를 받는 의료진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으면 산모의 사망률이 크게 낮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에는, 의사들조차 위생 관념이 없었다. 47쪽

- 페퍼 의원이 천국에 가서 신에게 "미국에 전국민의료보험이 도입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요?"라고 물으면 신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거라는 말이었다. "물론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내 생전에는 좀 어려울 것 같아." 92쪽 (폴 크루그먼의 글 재인용)

- 프로페셔널리즘의 확립이든 뉴 프로페셔널리즘의 확립이든 의사들이 먼저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의료개혁을 위해서도 의사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중략) 하지만 의사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외부의 힘이 의사들을 강제로 변화시키려 할 때에는 특히 저항을 보인다. 108쪽 

- 한국 사회에서 의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의료계에서는 "정설"이다. 선배 의사들은 후배들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말하곤 했다. "너희들은 막차를 탔다"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는 10년 전에도 있었고 20년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는 가장 인기 있는 직종 중의 하나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109쪽

-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 선진국들은 민간:공공의료 비율이 대동소이해서. 대체로 의원급 의료기관은 80:20이먀 병원급 의료기관은 반대로 20:80 정도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의원과 병원 모두 민간 의료기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의원급 의료기관은 95:5, 병원급 의료기관도 90:10 정도이다. 134-135쪽

-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 의사들은 의료소송에 대비하는 보험에 가입해 있으며, 그 보험료는 상당히 높다. (중략) 환자들의 소송을 부추기는 변호사들이 많은 것도 의료소송 증가의 주된 원인이다. 속칭 앰뷸런스 체이서로 불리는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들은 교통사고 현장과 병원 응급실을 맴돌며 피해자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소송을 권유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336쪽

- 우리나라의 모르핀 사용량은 2008년 기준으로 세계 42위, 전세계 158개국 평균치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제공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료서비스 중 하나가 통증 조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까운 일. 361쪽

소득과 수명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비례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이상 되는 나라들끼리만 비교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부유한 나라들만 놓고 봤을 때 평균수명과 가장 상관관계가 높은 것은 소득자체가 아니라 소득분배의 평등성이다. 

덧붙임 2. 저자는 송호근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국인의 마음속 깊이 깔려 있는 평등주의적 심성 역시 의료제도를 설계하고 집행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다.(38쪽)"고 쓰고 있는데 과연 한국인의 마음 속에 평등주의적 심성이 깊게 깔려 있나요? 저는 오히려 신분주의적 사고가 훨씬 더 심하지 않나 싶은데요. 

덧붙임 3. <나는 의사다>가 시즌 1을 끝냈더군요. 개인적으로 나의사가 무슨 질병 상담 프로그램화 되는 것이 좀 불만이었는데요. 차라리 이런 분들을 모시고 의료계의 현안과 그 뒷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으로 탈바꿈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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