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설국열차>가 개봉을 했네요. 역시 여기 저기서 말이 많군요. 말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죠. 저는 영화보고 나와서 싹 다 잊어버리는 영화보다는 그 뒤가 풍성한 영화를 좋아합니다. 물론 저도 개봉하자마자 가서 봤습니다. 처음 보고서는 약간 갸우뚱 했는데 생각할수록 참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뭔가 잊혀지기 전에 끄적거려 놓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이 다음부터는 스포일러 만땅일테니 주의해서 보시길!!!
1. 봉준호는 박찬욱이 아니다.
<올드 보이>의 장도리 씬을 열차 안 도끼 씬으로 바꿨다 어쨌다 했지만 봉준호는 역시 박찬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감독의 영화치고는 조금 잔인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망치로 이빨빼는 것 같은 장면은 없었네요. 액션이 약하다는 평도 있던데 저는 오히려 액션을 좀 더 뺐으면 싶더군요.
그것보다 봉준호는 박찬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뭔가 사람을 불편하게 (또는 익숙하지 않게) 만들 것 같은 예상이 계속 빗나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윌포드가 등장하는 첫장면에서 스테이크(이 영화의 중요 소재죠)를 굽고 있는데 왠지 그게 잡아간 어린 아이들 고기일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아니었죠. 허무하게 윌포드라는 인물이 허구가 아닐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엔진 오덕이 아닐까 예상했었지만 그것도 아니었구요. (설마 <박쥐>의 마지막 대사처럼 "죽으면 끝" 이럴까봐 약간 조마조마했는데... 게다가 그 유명한 에드 해리스는 영화 홍보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죠.)
2.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
아마 서양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월 스트리트 점령 (occupy wall street)" 운동이겠죠. 그에 비해서 우리 나라 30대 이상의 중년들은 학창 시절의 '계급 투쟁'일 것이구요. 솔직히 디테일에 강하다는 봉감독이 이 엉성한 배경의 원작 만화에 빠진 이유도 그 측면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걸 넘어섰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풍성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시스템 안에서 치고 박고 싸우는 것보다 시스템 밖을 생각하게 만드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영화로 볼 수도 있고, 투쟁하는 인류 역사에 대한 고찰일 수도 있고, 진보와 보수, 그리고 생태주의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윌포드를 신으로 커티스를 인간으로 본다면 실존주의 이후의 철학적 주제로 볼 수도 있고, 새누리당과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이야기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박정희(윌포드), 김대중(길리엄), 노무현(커티스), 노회찬(송강호)의 이야기로 해석해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테구요. 아무튼 사람들은 각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겠죠. 누군가에겐 열차 탈취 액션 영화일 수도!!!
3. 길리엄은 나쁜 놈인가?
여러 해석이 엇갈리지만 꼬리칸의 성자 길리엄에 대한 의견이 좀 분분한 것 같습니다. 윌포드가 말한 길리엄이 정말 그의 참 모습일지 아닐지, 작자의 의도가 궁금하네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팔 다리를 내 놓은 길리엄인데 제 생각에그건 윌포드가 커티스를 회유하기 위한 수작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 아니라는 의견이 더 우세한 것도 같네요. 이건 영화를 한 번 더 봐야할 듯!
4. 엔딩
허무하다는 말이 많은 엔딩. 요나와 타미는 새로운 지구의 아담과 이브가 되었을 수도 있고 떠도는 우스개 소리처럼 북극곰에게 잡혀 먹혔을 것이라는 소리도 있지만 아무튼 감독은 싹 갈아 엎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네요.
5. 상징들
사실 이런 영화 속 상징들은 때로는 감독보다 관객들에 의해서 더 많이 창조되기도 하는데 <설국열차>처럼 불친절한(?) 영화에는 그런 상징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윌포드의 W는 wall street의 느낌이 나고, 요나가 새 세상으로 나가는 시점이 18세 성인이 된 시점이라는 것, 공을 원했던 아이가 엔진에 들어가 노동 착취를 당하는 것은 "월드컵 축구공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죠. 아무튼 여기에 대해서는 우연히 보게된 아래 리뷰에 자세히 나와 있네요. 물론 저걸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식의 해석도 재미있네요.
<설국열차>의 이야기가 말이 안된다는 감상(?)도 꽤 있는 것 같던데, 영화든 철학이든 모든 것에는 기본적인 가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위에 개연성과 통일성이 있어야겠지요. <설국열차>에서 허술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기는 있지만 저는 오히려 <더 테러 라이브> 같은 경우가 더 개연성이 없어보이더군요. 영구기관에 가까운 열차가 18년 동안 뺑뺑이를 도는 것은 그냥 기본적인 가정에 들어가지만 당장 눈 앞의 마포대교가 박살났는데 그 와중에 시청률 따지고 70% 찍었다고 사라지는 국장은 뭥미??? 게다가 생방 중에 타 방송 아나운서와 인터뷰???
7. 아쉬운 점.
요나(고아성)는 투시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기척을 잘 듣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역에 비해 캐릭터가 조금 희미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마지막에 엔진 속에 아이들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때는 성냥 가지러 갔다가 갑자기 발견한 것 같은 약간 뜬금없는 느낌? 남궁민수(송강호)도 뭔가 대단한 기술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선 몇 개 이어 붙여서 문을 여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 조금은 허망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공들이 휙휙 죽어나간다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메이슨(틸다 스윈튼)이 그렇게 허망하게 간 것도 특히 아쉽네요. 뭔가 끝까지 긴장감을 갖고 가기 위한 역할을 좀 더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입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앞부분은 매우 좋았고, 중간 칸의 광경들은 짧고 굵게 편집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쓰시 먹고 수족관 보고 뭐 이런 것은 괜한 사족같은 느낌. 아이들 교실 장면도 조금 긴 듯했구요.
8. 총평
그래도 <설국열차>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배우들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았고 주제도 마음에 드네요. 아마 한 번 더 보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영화에 어설픈 색깔론을 덧씌우지 말자는 듀나님의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것도 하나의 해석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겐 한 편의 우화였지만요. 영화는 재미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이라면 권하고 싶습니다.
[덧붙임]
1) 누군가 봉준호의 <사회학개론>이라는 말을 했던데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대 출신 감독들은 자기 전공 개론으로 영화를 찍나?
2) 봉준호의 유머가 가장 잘 발휘되는 부분은 통역기가 등장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군요. 그런데 그 목소리도 사용료를 내나요?
3) 이 영화보고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양갱'과 '코카 콜라', 이공계 출신들에겐 '영구 기관'인가 보군요.
4) 메이슨 총리에게 신발을 던진 것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이 장면이 연상되죠.
5) 미래 인류의 식량 문제 해결책은 역시 "곤충"인가 봅니다. 이미 그런 이야긴 많이 있었죠. 궁금하시면 여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