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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한일전'에 대한 단상

바이오매니아 2000. 10.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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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11시에 있었던 2000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과 이라크의 준준결승은 축구를 보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준 한판이었다. 경기는 일본의 4-1 대승으로 끝났다. 결국 일본과 중국, 한국과 사우디의 4강 대결로 압축이 되었다. 중동팀의 부진과 극동팀의 약진이 두드러진 대회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화제는 일본 축구의 약진일 것이다.

지난 달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후반 종료 직전 어설픈 페널티킥으로 동점,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일본 축구의 영웅 나카타 히데토시 (23, AS.로마)의 실축으로 4강행이 좌절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회를 통해 일본 축구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단 한차례 월드컵 출전에 3전 전패, 승점 0, 득점 1, 한국전 역대전적 11승 14무 42패(90년 이후 5승 3무 7패) 이라는 기록들은 이제 장롱 속에나 넣어야 할 듯하다. 어제 이라크와의 준준결승 경기 전까지 일본은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이겨본 경험이 없었다 (역대전적 2무 2패).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93년 10월에 있었던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후반 종료 28초 전에 터진 동점골로 일본으로 하여금 사상 첫 월드컵진출의 좌절을 맛보게 한 팀이 바로 이라크였다. 그러나 어제의 경기는 일본 축구가 이제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흔히들 일본 축구의 고질병이라고 불리는 스트라이커의 부재의 극복이나 개인기와 전술 능력 발전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본 축구에 대한 투자, J-리그의 활성화, 외국인감독 영입으로 인한 선진기술 획득 등을 그 이유로 꼽는다. 모두 사실이다. 그 외에 일본 축구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먼저 두터운 선수층. J-리그 1부에만 16개 팀, 2부에도 11개 팀이 있다. 거기서 엄선된 선수들이기에 선수층이 두터운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스타 플레이어도 많다. 사령관 (일본에서 게임 메이커를 일컫는 말이다) 나카타가 빠진 자리에는 또 하나의 걸출한 미드 필더 나까무라 슌스케(22, 요꼬하마 마리노스)가 있다. 한국 팬들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선수이지만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만 하는 선수임에 틀림없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의 공격은 거의 나까무라의 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1년만에 돌아온 나나미 히로시(28, 이와타 쥬빌로)와 작년에 당한 큰 부상에서 회복되어 교체멤버로 활약하는 오노 신지(21, 우라와 렛즈)도 있다. 이렇게 중원이 튼튼한데다, 지난 올림픽에서 급성장한 다까하라 나오히로 (21, 이와타 쥬빌로)와 니시자와 아끼노리 (24, 세레소 오사카)가 최전방에서 골을 노린다. 올림픽 예선 당시 숙소를 이탈해서 연예인과 데이트한 죄(?)로 잠시 감독의 눈 밖에 났던 교체 멤버 야나기사와 아쯔시 (24, 가시마 안토라즈)도 뛰어난 공격수이다. 이 외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비진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대 교체. 미우라 카즈로 대표되던 일본 축구 중흥의 1세대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나나미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조 쇼지 등을 1세대의 끝자리에 넣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세대교체의 주역은 역시 축구 영웅 나까타 히데토시. 사실 현재 일본 대표의 주축들과 나이차이가 없지만 그는 1.5세대로 불려질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출현은 일본 축구의 붐을 몰고 왔으며, 일본 선수로서 세계 축구 최고 리그라는 세리에 A에 진출, 심지어 그의 어록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그는 동세대 젊은 일본 대표들과는 조금 그 궤를 달리한다. 그 이후로 나타난 오노, 야나기사와, 나까무라, 히라세 등등의 선수들이 바로 현재의 일본 대표선수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본 축구에는 악재도 있다. 몇 년 전부터 J-리그의 몇몇 팀들의 재정 사정이 나빠져 매각을 결정하거나 지방 자치단체에 떼어 넘기려고 하기도 한다. 또한 막대한 자금력으로 데려왔던 초창기의 유명 외국 선수들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올림픽 출장 후 나카타가 이번 대회 참가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가버렸다. 트루시에 감독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경질설, 사임설 등에 연일 시달린다. 며칠 전엔 이번 대회가 끝나면 자신이 그만두겠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축구는 근본적으로 스타일이 바뀌었다. 이제 그 심연을 조금 들여다보자.


그 심연에는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젊은 선수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 (나카타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나올 때 딴 짓 하는 모습을 보라). 즐기면서 축구를 한다.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국내 경기건 국제경기건 일본 축구의 특징을 꼽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나친 승부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수들에게 큰 부상이 많지 않다.


또한 자유롭게 개인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개인기의 부족은 개인기를 연마하는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측면보다 그것을 써먹을 기회의 부족이 더 문제다. 개인기로 돌파해봐야 붙잡히거나 걸려 넘어지는 축구에서 누가 돌파를 시도하겠는가. 승부만이 지상과제인 축구에서는 개인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게다가 수비 선수들에게 공을 차는 기술보다 상대 주공격수를 따라다닐 수 있는 끈질긴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력과 체력의 부족, 혹자는 이것이 일본 축구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기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닐까. 경기는 실력으로 이겨야한다. 예전 어느 축구 해설자는 '좀 거칠게 다뤄서 겁을 줘야 된다'는 말을 거침없이 방송에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력으로 하는 축구가 아니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일본은 예선 리그 동안 단 2장의 옐로우 카드를 받았을 뿐이다 (이라크와의 준준결승에서 2장을 받았지만...). 나카타는 상대의 거친 수비에도 반칙을 하지 않는 선수로 유명하다. 트루시에 감독이 대 이라크전에 앞선 인터뷰에서 한 말, "필요하다면 일본도 거친 경기를 할 수 있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부담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기량을 펼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여건. 이것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축구에 대한 지원과 여건 만들기는 결코 자본의 투입만으로 끝이 아니다. 자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국가대표선수들이지만 나는 때로 그들이 불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재미있는 축구를 보기 위한 응원이 아닌, 자아도취적인 승리를 위한 부담만을 안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오는 26일, 예선에서 일본이 4대1로 이겼던 사우디와 우리와의 준결승이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또 한번의 한일전을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정말 멋진 경기, 깨끗한 경기, 그리고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줘서 승패를 떠나 박수를 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승리를 거둔다면 금상에 첨화하는 격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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