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의 글을 읽고 며칠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네. 내가 오랫동안 교수로서 해왔던 고민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내가 하는 고민을 학생들에게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다행스러운 면도 있는 것 같고.
돌이켜 보면, 벌써 "교수"를 직업으로 가진지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고 있군. 시립대에 온 지가 벌써 7년째이고, 시립대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교수를 한 것도 8년이고. 거기에 미국에서 강사를 한 2년을 더하면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학에서 학생을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네. 미국에서는 주로 MBA나 학부 4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영전략이나 국제경영학 과목을 가르쳤지. 대개 내 수업은 학생들이 졸업하는 학기에 경영학을 총정리하는 기회로 듣는 과목이었고.
처음에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친 것이 95년이니까, 지금 03학번이 국민학생이었을 때인가? 미국Georgia State University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중앙대학교에 교환교수로 나왔을 때지. 물론 그 때는 일년동안 경영학원론 한 과목하고 대학원 한 과목만 하는 아주 부담없는 경험이었지만 말이야. 그 때 내가 했던 과목이 95학번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영학원론 원강이라는 것이었는데,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었어. 벌써 8년전에 중앙대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말이지.
잘 알겠지만 이미 많은 대학에서, 특히 경영학과에서는 전체 과목의 2-30%가 영강으로 진행되고 있다잖아? 그리고 나서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가 시립대로 부임한 것이 97년이네. 97년에 처음 본격적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연히 미국에서 가르치던 방식과 수업양을 그대로 사용했지. 그런데 미국에서 쓰던 수업계획서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너무나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된 거야. 학생들이 도저히 따라오질 못하는 거지. 결국 미국에서 하던 양의 반이 아니라, 반의 반도 못하게 되더라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네. 아 이 친구들이 과연 어쩌자고 이러고 있을까.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고, 글로벌 시대가 (그 때 당시로 보면) 이미 코 앞에 닥쳐와 있는데 이렇게 준비해서 될까라는 걱정이 정말 많이 들더군.
그때부터 7년이 흐른 지금에야 겨우 미국에서 내가 하던 양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었다네. 자네가 들은 그 수업 말이야. 얼마나 숙제가 많고, 준비할 게 많아 부담이 된다는 수업이라고들 불만이 많은가. 미국의 일반적인 대학생은 한 학기에 4-5과목을 듣는데, 거의 모든 수업이 내 수업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네. 그런 수업을 4년 동안 들은 미국의 대학졸업생과 한국, 특히 우리 시립대의 학생들의 경쟁력을 비교해 본다면 아주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는가? 왜 미국의 대학이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97년만해도 미국의 대학생은 미국에서, 한국의 대학생은 한국에서 경쟁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만, IT의 발달은 이미 그런 생각을 과거의 유물같이 만들어 버렸다네.
기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조직이나 기능을 한국이나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 같은 특정한 지역에 꼭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지. 예를 들어, 한국지사의 인사기능을 이제는 꼭 한국에 둘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는 거야. 한국, 일본, 호주, 홍콩, 싱가폴 등 모든 아시아 지역 지사의 인사기능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게 된다면, 어디로 집중해야 할까? 한국? 호주? 그 의사결정을 내리는 핵심결정요인은 바로 호주나 일본, 호주, 홍콩 등의 인사담당자와 비교한 한국 인사담당자의 경쟁력이라는 것이지. 경쟁이 글로벌화되고 있다라는 것은 제품시장의 경쟁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이런 사실은 너무도 명백해지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생은 결국 미국이나 홍콩이나 싱가폴의 대학생과 경쟁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리겠지 (물론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제는 개인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네. 얼마 전에 무라까미 류의 소설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지. 그 사람이 “일본은 필연적으로 망할 것이다. 일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글로벌화되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인데, 이런 인재들은 지금 일본을 떠나고 있다”라는 글을 썼더군. 이 문장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꾸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들은 이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것이 아니야.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지금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것일 뿐이지.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인재들이 한국에 있는 것을 유리하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정부정책이 나와야 하는 것이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가경쟁력에 대해 연구기관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학생들은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바뀌는 환경에서 생존해나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만 하는 거야.
미국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는 상당히 인기가 있는 교수였고, 수업평가를 하면 2-30명의 학생으로부터 5점 만점에 5점을 (그러니까 모든 학생이 모든 평가항목에서 5점을 주었다는 거지)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내가 왜 시립대에서는 자네 말처럼 “경영학부 학우들에게 인심을 잃은” “모든 학생들이 비추라고 말하는” 그런 교수가 되었을까? 물론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겠고, 내 개인적인 스타일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 나처럼 소리치고 야단치고 “갈구는” 교수님들은 별로 안 계실 테니까 말이야.
수업시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만, 나는 아주 초조하다네. 교수로서 나의 고객은 “사회”이고 “기업”이다라는 말은 한 적이 있지? 나의 임무는, 그리고 나의 “존재의 이유(Raison d’tre)”는 나의 “제품”인 우리학교 학생들을 나의 고객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양성해서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빨리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나를 아주 괴롭게 만들고 있지.
사회가 원하는 인재, 혹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청년실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직자는 직장을 찾아 헤메고 있는 동안, 기업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우리 학생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제대로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얼마 전에 우리 학교 취업비율이 어떻게 집계되고 있는지를 알고 너무 놀랐다네. 아무도 정확히 집계할 수 없기 때문에, 작년보다 약간 높은 수치로 그냥 보고한다는 거야. 우리 학교 학생들의 많은 수가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큼 충분한 경쟁우위를 갖추지 못한 채 졸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신입생들은 그런 선배들의 모습은 정확히 보지 못한 채, 선배들을 당연한 모델로 여기고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내 느낌이지.
우리 학교 졸업반 학생들하고 이야기하면 너무도 답답한 게 많다네. 세월이 가고 세상이 바뀌었다면 뭔가 달라질 법도 한데,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어제의 방식」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TOEIC 몇점이 필요하고, 학점은 어떻고 라는 식의 과거의 모델에 집착하고 있는 거지. 그게 안되면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으로”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격증으로”라는 식으로 말이야.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단순한 TOEIC점수가 아닌 진짜 영어실력이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이고 발표력이고, 경력사원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는 신입사원이지. 결국 남이 지시하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피동형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현대자동차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하고 삼성전자에 내는 원서와 면접요령은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는 거야. 4학년 때 똑 같은 원서에 똑 같은 자기소개서를 여기저기 내고 “성실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세상이 이미 되어 버렸다네. 그러니까 이미 3학년때면 영어나 논리력 같은 기초는 튼튼히 갖추고 자신이 원하는 경력에 특화되는 방향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런 것을 국제경영학이나 경영전략이나 경영사례연구 같은 과목을 듣는 3-4학년 학생들에게 말해주면서 느낀 점이 무엇인 것 같은가? 미치도록 답답하지만 “이미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네. 내가 경영학원론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야. 1학년 때부터 내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면 3-4학년이 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지. 물론 몇 년전에도 한번 시도했다가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를 한 적도 있다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교수님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동감해주시기 때문에 계속해 볼 생각이긴 하지.
내가 강조하는 것이 몇가지가 있지? 바로 그것 때문에 숙제가 많다라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먼저 글로벌화된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에서 원서 교과서와 Critique를 요구하는 것이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큰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점이 바로 영어거든. 미국이나 홍콩, 싱가폴, 호주를 제외하고라도 서울의 많은 대학의 학생들이 이미 2-30%의 과목을 영어로 듣고 있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아직도 영어에 대해 막연히 “해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겨우 TOEIC이나 하자라는 식이 되어버리잖아? TOEIC이란 이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지, TOEIC점수가 높다는 것만으로 기업이 “아 영어 잘하는구나”라고 인정해주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면 우리 학교 학생들은 “최소한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을 하지? 그런데 이제는 “최소한”이란 아무 의미가 없지. 워낙에 많은 경쟁자들이 있으니까, 분명한 경쟁우위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기업 인사담당자들 역시 시립대학생은 영어를 못할 것이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아 이 친구는 TOEIC이 무척 높네? 아 영어를 잘 하겠군”이라고 호의적으로 보기 보다는 “아 이 친구는 역시 TOEIC점수만 높지, 영어는 잘 못하는 군”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네.
자 그렇다면 영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TOEIC은 한 1년 정도 집중해서 투자하면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영어실력은 1-2년 가지고 대폭 늘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 경험에 의하면 영어회화에서 “I am, you are, he is”같은 “Be” 동사를 제대로 활용하는데 까지만 1년이 꼬박 걸렸다네(물론 1년 동안 매일 두시간 이상 영어에 투자했는데도 말이야).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해야 졸업할 때 그래도 어느 정도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 자 이제 영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는 세상에서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답은 “무식하게, 꾸준히, 일찍부터”라는 거지. 다른 학교 학생들은 2-30%씩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야.
물론 어렵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세상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네. “나는 원래 영어를 잘 못해요,” “지금까지 발표식 수업을 받은 적이 없어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요,” “나는 집이 좀 여유가 없어서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회는 “그러냐. 참 안됐구나”라고 위로를 해 줄지는 몰라도 그런 부분을 감안해서 가산점을 주지는 않는다네. 불리한 위치에 있는 만큼 더욱 노력해야 할 뿐이지.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네.
자 그렇다면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할까? 어차피 4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학교 학생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있는데, 그 4년을 어떻게 보내도록 유도해야 할까? 갓난 아이처럼 애지중지 보살펴서 키우는 것이 참 좋아보이기는 한데, 그렇게 해주면 4년 안에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기 호랑이 방식이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옳은 것 같다네. 살아 남는 일부는 틀림없이 4년 후에는 상당한 역량을 갖출 만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지. 안타깝게도 포기하고 벼랑에서 떨어져버리는 아기 호랑이가 너무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Essay나 Book Report같은 숙제가 기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표현력과 논리력의 향상이지.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전통적으로 글을 통한 Communication보다는 얼굴을 맞대는 말을 통한 Communication을 선호해왔지만)에서도 Written Communication이 빠른 속도로 강조되어 가고 있지. E-Mail의 영향도 크지만, 이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협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점차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어가면서, “근거”나 “증거”로 남길 수 있는 글을 선호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국의 기업에서도 이제는 “Powerpoint”나 “Word”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글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폭 늘어났다네.
그렇다면 글을 통해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네. 여기서 중요한 건 표현력과 논리력이지. 어떤 사항이 왜 문제이고(많은 경우에 문제로 지적되면 그 문제를 만들거나 간과한 사람이나 조직은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지를 납득시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아),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향은 무엇이고, 왜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창의력”의 문제잖아? 새로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추는 것 역시 무척이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량이지. 이런 창의력을 키우는 것은 “경험”과 “논리력”이야. 많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서 풀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해결책에 대해 누군가가 비판을 해 주는 것; 이런 능력을 학원에서 혹은 교과서로 주입식으로 배울 수는 없거든. 그야말로 1:1 방식으로 “도제”와 같은 방법으로 전수될 수 밖에 없다는 거야. 마치 자전거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논리력이란 어떤 사안을 “당위”가 아닌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수업시간에도 많이 지적이 되었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라거나 “내 생각은 이렇다”라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역량은 어떻게 갖출 수 있을까? 정답은 “무수한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해 보는 것”이지. 내 생각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학기 초와 학기 말의 자신의 글쓰는 역량을 비교해보아도 자신의 실력이 늘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을 것 같네. 물론 많은 학생들은 이제 수업이 끝났으니 다시 귀찮게 무엇인가를 쓸 것으로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사고의 기본축이 보다 논리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결국 수업의 요구사항들이 다른 수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네. 하지만 숙제의 양을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한다면 절대로 많지 않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네. 그리고 이 정도를 해내야지 향후 자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것이 내 소신이기도 하고.
가끔 이런 말을 하는 학생들이 있지. 세상에 영어도 잘하고 글로벌화도 잘 되어 있고, 창의력도 갖추고, 표현력도 좋고, 논리력도 분명하고, 자신의 진로에 대해 분명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매우 적다”라는 거지. 바로 그래서 세상이 “부익부, 빈익빈”으로 바뀌고 있거든. 불과 1-2년 전에 20:80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지? 세상에 20%만이 무엇인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고, 80%의 사람들은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예상 말이야. 물론 100년쯤 후에는 물질적인 부가 확대되어 사회보장의 혜택을 보면서 놀고 먹는 것 자체가 대단히 좋은 수준까지 올라가서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사회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 느낌으로는 이미 20:80의 시대는 지나고, 10:90정도로 바뀐 것 같지만, 얼마 전에는 더욱 충격적인 글을 읽었다네. 일본의 어떤 사람이 이미 일본은 5:95로 진행하였고, 곧 1:99로 변화될 것이라는 말을 했더군.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20년 이내에, 그러니까 03학번 학생들이 40대가 되기 전에 한국도 1:99의 사회로 진행된다는 것이지. 나는 그 때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될 수 있으면 많이 1%의 그룹에 속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네.
자 학생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두번째 중요한 불만은 “인격적”인 부분이지? 예를 들어,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 말이야. 내가 그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잘못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네. 하지만 과연 내가 그 말을 왜 할까? 내가 그 말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먼저 내가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겠지. 수업시간에 떠들고 소리치고 야단치는 일은 무척 피곤한 일이거든. 그냥 앉아서 발표나 시키고 듣고 있거나, 아니면 칠판 앞에서 학생들이 따라오던 말던 나홀로 진행하면 아주 편하게 살 수도 있잖아?
나는 시립대와 시립대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와 보인다네.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만, 진정한 자부심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깜짝깜짝 놀라면서 신경질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가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을 받지. 우리 시립대의 특성을 몇가지 들어보면 먼저 정말 지나치게 “내부지향적”이라는 게 눈에 띈다네. 전농동 밖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바뀌고 있는지 전혀 무시하고 예전의 시립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두렵다네. 물론 그래도 변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변화하는 속도가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가 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잖아?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지난 학기에 Book Report용으로 제시한 책 중에 “IT와 E-Business”에 관한 책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그 책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네. 신문이나 TV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향후 IT관련 인력부족현상이 어떻고, IT와 E-Business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등인데도 말이지. 아주 두려웠다네.
우리 시립대를 연세대나 고려대 같은 학교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잖아? 내가 수업시간에도 자주 이야기하지만 “연대나 고대를 한 번 가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백양로를 걸어 올라가기만 해도 그 넘치는 플래카드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연대나 고대가 학교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이것은 결국 학생들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하고 똑 같은 이야기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과연 우리 학생들은 알고 있을까?
자 학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는 연대나 고대의 학생들과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밖에 나가서 경쟁을 해야 한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하지? “우리 시립대도 연대나 고대만큼 지원하라!!!”라고 데모를 해야 하나? 나는 그건 비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보는 거야. 학교가 그렇게 바뀌는 것은 요원하니, 그런 만큼 학생들이 더욱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아키라 쿠로사와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이 있다네. 그 사람이 50년대에 만든 작품 중에 “라쇼몽”이라는 흑백영화가 있지. 그 마지막 대사가 “인간은 너무도 약한 존재인 나머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라는 거야. 장애자가 세상의 눈을 회피하고 자신의 방안에만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감추면서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것 같다고 비교하면 좀 지나칠까?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을 느끼면서 말이야.
우리 학교는 똥통이라네.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고 있고, 충분한 자극을 주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야. 그런데서 우리 학생들이 “똥통에서 용났네”를 축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의 약점에 눈을 감아 버리는 장애자”같은 모습을 떨쳐버리고 “나를 믿자” “내가 해내자”라는 도전의식을 갖기를 바란다네. 그 정도로 강력한 자극이 필요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져 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위기의식이기도 하고.
이런 행동이 “인격적인 문제”로 비춰질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네. 마치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이 경제학부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다시 한번 고백하자면 나는 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해. 최소한 경제학원론하고 미시경제학은 경영학부 학생들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허접한 경제학과”라는 농담에는 경제학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고, (이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게 내 방식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은 밝혀두고 싶어. 마찬가지로 “시립대는 똥통이다”라는 말에 우리 시립대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담겨있는 내 나름대로의 애정표현방식이라는 것도 말이지.
교수로서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지만, 모든 학생들을 만족시키커나 학생들에게 모두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도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나하고 싸우면서 커나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겠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경영학원론도 여러 교수/강사가 나눠서 맡고 있는 것 아닐까?
기억나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첫 발표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발표를 마무리지었던 학생이지. 나중에 내 수업을 통해서 세상을 조금 배웠다라는 인사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 아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네.
두서 없이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아 좀 어색하기도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구나. 아무쪼록 우리 시립대 학생들이 역량을 갖춰서, 사회에서 훌륭하게 한 몫을 해 낼 수 있는 인재로 발전해 주기를 바라네. 그래야 우리 시립대가 “똥통에서 벗어난 용”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어?
긴 글 읽어줘서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