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과학블로그 사이언스톡톡의 다섯번째 글, "앞치마와 과학의 상관관계"입니다. 원래 제목은 "요리는 과학과 무슨 상관일까?"인데 좀 더 흥미를 유발하도록 바뀌었네요.
지난 달에 뉴욕타임즈 food columnist 해롤드 맥기의 <음식과 요리>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는데 참 반갑더군요. 1984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 주방의 바이블이라고 불렸던 책인데 2004년 증보판이 번역되었습니다. 요즘 방사능 때문에 전문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데 이 정도면 충분히 전문가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이 참 형편없는 것도 많은 나라지만 이런 것은 좀 배울 필요도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래서 겸사겸사해서 쓴 글입니다.
어제 우리 대학교에 소셜 디자이너인 박원순 선생님이 오셔서 학생들 대상의 특강을 하셨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창의적인 직업을 무려 1,000가지 가까이 소개하셨는데 여러 가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강연 마지막에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십계명을 소개하셨는데 그 10가지 항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과학을 가지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갈 수도 있을까? 가끔 우리 학과에 입학한 저학년 학생들 중에 이런 소리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 “교수님 저는 요리에 흥미가 있어서 이 과에 왔는데 와 보니 제 적성에 잘 안맞는 것 같아요.” 하긴, TV 드라마에서 파티쉐니 바리스타니 폼나는(?) 직업들을 보며 식품과 요리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2학년 때까지는 식품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고 화학, 생물, 생화학, 미생물학, 유기화학을 가르치니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할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실용적인 것이 대우받는 세상에 말이다.
하지만 내 대답은 이렇다. “너, 그거 아니? 세상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요리를 하면 뭐가 어떻게 변화가 되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거 말이야.” 만일 그 학생이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고 요리를 한다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우리 학과가 요리사를 배출하는 학과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 언니들이 요리와 관련된 과학 지식마저 뛰어나다면 더 멋진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지난 달 우리나라에 책 한권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제목은 <음식과 요리>(원제: On Food and Cooking: The Science and Lore of the Kitchen). 초판이 1984년에 출간되었고 2004년 증보판이 나왔는데 20년이 넘도록 “주방의 바이블“로 불렸던 책이다. 무려 1326쪽이라는 엄청난 두께를 가진 이 책의 정가는 78,000원(허걱!). 까딱하면 흉기로 사용될 수 있을 책을 지은 사람은 food guru(정신적 스승이라는 뜻의 산크리스트어)라는 별명을 가진 해롤드 맥기라는 사람이다.
왼쪽부터 <음식과 요리> 번역본, 원서, 그리고 작년에 새로나온 맥기의 후속작
해롤드 맥기는 어려서 화학, 물리학을 좋아했고 천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 입학했으나 이후 전공을 바꿔 영문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예일대학교에서 “Keats and the Progress of Taste.”라는 제목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오랜 동안 뉴욕 타임즈에 컬럼을 쓰고 있는 해롤드 맥기는 2008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100인(100 Most Influential People in The World)에 뽑히기도 했다. 보통 그를 과학저술가라고 부르지만 타임지에서 그를 과학자/사상가(Scientists/Thinkers)로 분류했으니 그를 과학자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이렇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식품에 대한 담론은 주로 소비자/시민 단체나 언론에서 제기하는 위해성이나 식품/요식 업계에서 주장하는 기능성 위주로 이루어진다. 소위 식품의 3차 기능이다. 그러다보니 1차 기능과 2차 기능, 즉 영양성과 기호성은 점점 무시당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맛있는 식품”보다 “어딘가에 좋은/나쁜 식품”에 관심이 지나치게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맛있는 식품은 왜 다 몸에 나쁘냐는 망언(?)까지 버젓이 방송에서 나온다. 그리고 식품이나 외식산업에서 소위 스토리텔링이 유행하면서 이런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식품에 대한 기본이 무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기본에 충실한 책이다. 일반인이 보기엔 좀 어렵고 딱딱하겠지만 식품이나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둬야 할 내용이 가득하다.
여기서 단순히 책 소개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분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안가는 학생은 있어도 못가는 학생은 없다고 일컬어지는 시대이다 보니 때로는 “대학은 가서 뭐하냐, 기술이나 배워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술은 우습게 보이냐고 타박해주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이제 이 사회는 무엇을 하건 기본적으로 알아야하는 지식이 과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이유는 잘 모르는 채 과거부터 해왔던 것들을 단순 반복하여 숙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새롭고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그 원리와 이유를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와 이유를 배우는 첫걸음은 기초적인 과학 지식이다.
과학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물을 전공한 요리사, 식품을 전공한 무역상, 물리학을 전공한 디자이너, 의학을 전공한 소설가가 기존의 시스템에 새로운 시각을 줄 수도 있다. 현대는 소위 융합학문의 시대인데 오히려 이런 융합은 우리 실생활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을 꼭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 네이버 지식인 두들겨서 얻는 지식들이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과학은 체계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필자 이한승 교수는
1969년 서울 출생. 1989년 연세대 식품공학과에 입학하여 계속 같은 과에서 공부하면서 학과가 식품생물공학과를 거쳐 생명공학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였고 1998년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동경대학, (주)제노포커스, 미국 죠지아대학 등을 떠돌며 포닥으로 세계일주를 계획했으나 2007년 여름부터 부산의 신라대학교 바이오식품소재학과에 임용되어 재직중이다. 유전자 분석(BLAST)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인터넷 세계에 입문하여 15년 가까이 홈페이지와 블로그(http://www.leehanseung.com)로 세상과 소통해 왔으며 극한미생물에 관심이 많아 극한미생물연구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