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책이 동시에 집으로 날아 왔는데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남자가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성소(?)가 싱크대 앞이기 때문이었죠(저는 정말로 설거지를 좋아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설거지만 좋아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설거지 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가뜩이나 여혐이니 '미소지니'니 하는 논란이 시끄러운 판국에 한국 기독교계에 가사와 육아에 관한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자는 책이 나왔구나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을 보니 정신실 선생님. 최근 기독교 도서 분야에서 활약하시는 여성 작가시죠. 그러자 갑자기 책을 읽을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가뜩이나 남녀차별(?)이 만연한 기독교계인데 뭔가 그걸 정당화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살짝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들어가는 글을 읽고 흥미가 생겼고 첫 장을 읽고 정신을 차렸고 두번째 장을 읽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 반까지 한 숨에 다 읽어 버렸네요. 

 

이 책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은 보기 드문 에세이입니다. 사실 기독교 서적 중에서 에세이를 읽은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 장에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하늘의 삶을 살고 싶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일상이다. 정말 내가 진실로 신앙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하늘이 아니라 일상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거룩한 시간 안에 오롯이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라 늘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의 한가운데 말이다.(p14)

이 부분을 읽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실 수 많은 기독교 서적이 나오고 제자 훈련이 시행되지만 일상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를 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실은 요즘 제가 어떤 지역의 교회를 찾고 있는데 몇몇 교회를 다녀봐도 이런 부분을 강조하는 교회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능력, 기적, 위대함, 등등을 외치는 교회는 많고 이것들 모두 중요한 기독교의 주제이지만 이 시대에 맞는 주제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외치는 분들은 과연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구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골교회 목회자의 자녀로 자라 늦깎이 목사의 아내이자 두 자녀의 엄마가 된 한 자매(사모라는 말을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ㅎㅎ)의 일상분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상분투기가 그 동안 읽었던 유명한 저자들의 명저서나 강해설교집보다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닌텐도를 사주지 않고, TV를 없애고, 과외를 시키지 않는 등의 신앙적 결단 속에서 겪는 갈등과 고민들은 저의 고민이기도 했고 '레위인 콤플렉스'나 모태 바리새인은 저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말이죠. 

닌텐도를 사 주는 것보다 안 사 주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학원을 보내는 것보다 안 보내는 일이 훨씬 더 강인한 마음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p45)


우리 아이만큼은 성적으로 줄 세우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하건만 일말의 초조함조차 없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 교육이 진보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옆집 엄마'라고. (p118)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모이면 대화 주제의 알파와 오메가는 '애들 공부' 이야기다. 아니면 '애들 공부해서 대학가는 얘기' 또는 '애들 재능을 발견해서 공부해서 대학 가는 얘기'다. 아줌마들이 모이는 곳에 '아줌마'가 주체가 되는 얘기는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아이들 학교 엄마들을 사귀지 않는다. (p154)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남다르게 사는, 요즘 쓰는 말로 래디컬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겉으로는 세상과 다르게 사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여도 오히려 그 속에 적나라한 갈등이 있고 고민이 들어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 책에는 단순한 개인의 일상과 연관된 구조적인 문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앙적인 고민들도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의 일상 나눔은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논쟁거리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이 책에는 그걸 적절히 일상과 함께 드러내고 있죠.

죄악이 관영하고 타락했다는 세상에서조차 용납되지 않는 일들이 교회 안의 목사님께 일어났다 하면 다 이해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은혜를 가장한 비상식'은 이제 교회 안의 상식이다. (p133)


일상에서 가장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시던 젊은 목사님이 강대상에만 올라가면 꾸중하고 윽박지르는 무서운 어르신이 되기도 한다.(p81)


하지만 사실 제가 이 책에 빠졌던 이유는 바로 2장에 나오는 시아버지 에피소드(아버님의 소주잔)였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으니까요. 저희 아버지랑 비슷한 점도 많았구요.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살뜰하게 아이들을 보살피시는 아버지' 말이죠. 사실 그 아버님 버전의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 나오면 어떨까요?


아무튼 교리와 경건생활 또는 제자훈련에 관한 책이 기독교 서적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기독교 서적에 손이 잘 안가시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음엔 정말 남자가 쓴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제자훈련이자 신앙인의 모습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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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이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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