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바쁩니다. 언제 바쁘지 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요즘엔 약간 정신적으로 힘들 정도로 바쁩니다. 여러가지 행사들까지 겹쳐서 주말에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주중에는 새로운 과목을 하나 맡아서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연구실에 들여놓은 라꾸라꾸 침대
게다가 여기 저기서 각종 회의와 모임들은 왜 그리 많은지, 사교적인 모임은 다 포기했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제 방에 아예 접이식 라꾸라꾸 침대를 하나 들여다 놓고 졸릴 때 짬짬이 30분 정도 눈을 붙이기도 합니다.
대체 책을 읽어 본 것이 언제인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산국제영화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영화를 무려 7편이나 예매했습니다. 물론 겹치는 시간도 있고 예매한 영화를 다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 몇 편은 취소해야겠지만 그냥 예매를 하는 것만으로도 잠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보고 싶은 영화들은 대부분 매진이라 나중에 취소되는 표를 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매한 영화 중 이번에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영화가 이란의 아미르 나데리 감독의 <컷>이라는 영화입니다. 이란 영화라고 해봐야 10여년 전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인을 얻었었죠!) 영화 두 세편 말고는 없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나데리 감독에 대한 아래의 일화가 참 인상적이어서 말입니다. 그냥 요즘처럼 '쉬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한 번 되새기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나름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한 번 읽어보시죠.
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자 예전 부산MBC FM 모닝쇼에서 영화소개하셨던 미나샘 홈피에서 훔쳐온 글입니다.
1968년. 이란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키가 작고 단단한 체구를 가진 22살의 청년은 우연히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감독에 대해 알게 된다. 나는 그가 큐브릭의 어떤 영화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흔들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청년은 스탠리 큐브릭이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촬영하고 있으며, 겨울쯤에 시사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드시 그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 그는 영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이란에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수입되리라는 보장이 없고, 검열에서 장면이 삭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그는 반드시 영국에 가서, 시사회에 참석해야만 한다. 결국 몇 달간 모은 돈과 전재산을 합쳐 여행경비를 마련한 그는 친구를 찾아가서 종이를 내민다. My name is Amir Naderi. I'm Iranian. I want to go to London to see Kubrick's new film, <A Space Odyssey> 영어를 하지 못하는 그는 영어식 발음을 뒷면에 이란어로 적어줄 것을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종이 한장을 들고,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를 떠난다.
전재산을 털었지만 그의 여행길은 순탄하지 않다. 비행기는 진작부터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를 향해 육로를 따라 이동한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때로는 걷고 길에서 노숙하며 몇 나라를 건너가는 그 길은 꼬박 한달이 걸렸다. 국경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뭔가를 물을 때마다 그는 종이를 펼쳐들고, 그들 앞에 영어가 보이도록 내밀며 뒷면의 표기대로 발음을 또박또박 읽어냈다. 마이 네임 이즈 아미르 나데리. 아임 이라니언. 아이 원트 고 투 런던 투 씨 큐브릭스 뉴 필름 어 스페이스 오딧세이. 수십번도 더 같은 말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발음은 다 외웠지만, 혹시 그의 발음이 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사람들의 눈 앞에 종이를 다시 내밀었고, 그러는 동안 손 때가 묻어 종이는 꼬깃해졌다. 그가 제대로 런던에 도착한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청년은 가을에 고향마을을 떠나왔지만, 런던은 이미 눈이 내리고 있었다.
런던 거리에서 만난 경찰은 이 초라한 행색의 이방인 청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유달리 많은 것을 물었지만 청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여전히 하나뿐이었다. 마이 네임 이즈 아미르 나데리.. 몇 번인가 반복되는 문장을 듣고나서야, 경찰은 더 물어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찰은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알아내고, 직접 이란 청년을 극장 앞까지 데려다준다.
극장 앞, 눈 덮힌 아침 거리는 한산하다. 이제 몇달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은, 어느 때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창구 앞에서 돈을 내밀며 다시 종이를 펴들고 외친다. 마이네임이즈아미르나데리, 아임 이라니언, 원투씨 큐브릭스 스페이스 오딧세이! 하지만 매표구 너머에 있는 여점원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돈을 흔들어도 소용 없다. 이상한 일이다. 영화 시사회가 있는 날이 맞는데. 그는 몇번이고 다시 마이네임이즈 아미르 나데리 아임 이라니언!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외쳤지만, 여행 내내 마법의 주문처럼 그를 도와주던 그 문장이 정작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돈이 적은 것일까? 그는 돌아갈 차비까지 모두 양손에 쥐고 창구에 밀어넣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돈 마저 도로 밀어내어 버린다.
청년은 시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표를 사면,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시사회가 초대받은 사람들만 영화를 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라는 것은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알았더라면, 그 긴 여행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망연자실한 그는 극장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는다. 그가 런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완벽하게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매표소의 여직원이 그에게 손을 흔든다. 무슨 뜻일까. 그녀가 손을 비비고,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고, 다시 불을 쬐는 시늉을 반복하는 동안, 청년은 극장 안에 들어와 몸을 녹이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게 눈치챈다. 극장 로비의 작은 의자에 앉은 청년은 새삼스럽게 극장을 둘러본다. 오늘밤, 이 곳에서 <스페이스 오딧세이>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그 영화를 볼 수 없다. 먼 길을 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극장의 문이 잠깐 열리고, 그 서슬에 차가운 공기가 로비로 몰려든다. 따뜻한 온기에 살짝 졸음이 쏟아지던 청년은 놀라서 잠이 깬다. 누군가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다. 저 사람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간다. 아마 그 광경을 보았다면, 매표소의 여직원은 자신이 베풀었던 호의를 후회하며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청년은 다급하게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남자의 눈 앞에 펼쳐보이며 외친다. 마이네임이즈 아미르 나데리, 아임이라니언, 아이원투고투런던투씨큐브릭스뉴필림어스페이스오딧세이. 아아 할 수 있는 영어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는 같은 말을 열번이라도 더 반복할 수 있었다. 세번째로 마이네임이즈를 외쳤을 때, 남자가 청년의 어깨를 잡는다. 한달여의 여행길에 꾀죄죄해진 더럽고 남루한 차림의 이란청년의 어깨에 스탠리 큐브릭이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가 열리기 열 시간 전, 텅 빈 극장에는 단 두 사람이 앉아서 최초로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상영을 지켜보았다. 직접 상영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른 아침 극장을 찾았던 큐브릭과 종이 한장을 손에 쥐고 먼 나라에서 찾아온 이란 청년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이후에야 큰 숨을 몰아쉰 청년은 반드시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비장하게 큐브릭에게 말한다. 하지만 큐브릭은 그 순간, 청년의 이란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상기된 청년의 표정을 보고, 잘봤다는 말이거나 고맙다는 말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베니스영화제였던 것 같다. 이번에는 영어로 인사하고, 큐브릭에게 극장에서 그가 속삭인 이란어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려줄 수도 있었다. 그의 작품도 함께 상영되고 있었으니, 약속은 이미 지켜진 셈이었다.
* 이 영화같은 이야기는 아마 나데리 감독의 기억을 따라 구술되었을 텐데 IMDB에 따르면 실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1968년 4월 2일에 미국에서 먼저 프리미어 공개가 되었고 런던에서는 5월 10일에 프리미어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데리가 테헤란에서 런던까지 이 영화를 보기위해 여행한 것은 책으로도 나와 있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