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다.
작가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다.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작품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의 전자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통신 수단 광고가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운동과 스포츠는 과학만능주의를 선언한 지 오래다. 예술 문화 부분만 그러한가. 인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문학도 인문'과학'으로 과학에 스스로 흡수통합되어 버렸다. 사회과학, 교육과학, 생활과학 등등, 이제 '과학'은 모든 학문에 붙는 공통적인 접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국가에 경제위기가 닥쳐오니 모두가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어려운 경제위기를 풀기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하고 결국 외화획득에는 신기술에 의한 수출 증대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고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특혜'까지 주어가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낱말을 머리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대중들과 가깝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을 요약해서 인류 역사책에 한 줄로 적는다면 아마 복제양 '돌리'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조그만 양 한 마리가 사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된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우리귀에 들렸다. 하지만 '돌리'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에 왔던가.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수정란 분할 방법으로 복제 개구리(1952년), 복제 생쥐(1983년), 복제 송아지(1990년)를 만들어낸 전력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복제 기술의 발달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가. 그리고 어느 날 나타난 어린 양 '돌리'에게 경악하고 또한 박수를 보내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문화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의식과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주는가. 바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 매체(媒體, media)다.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리'는 전세계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양이 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대중 매체의 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각 종 대중 매체의 발전을 급속하게 촉진시켰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책에서 언론과 방송으로,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중 매체의 발달은, 금속활자가 위대한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쇄기구, 통신 장비등의 발달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이렇게 과학기술에 빚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서 과학기술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학술지를 통해 인정받고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학술지에 쓰이는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때문에 해석이 필요해졌다. 대중 매체가 바로 여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과학기술의 보도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정확한 사실 보도의 부재와 전망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이다.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외국 언론의 무분별한 인용보도와 전문학술지를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년 전만 해도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DHEA(dihydroepiandrosteron)의 경우가 그렇다. 96년 말 <뉴스위크>의 보도를 계기로 갑자기 불어온 DHEA는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으로,여성에서는 에스트로젠(esterogen)으로 바뀌는 전구물질(precursor)로서 몸안을 순환하는 가장 흔한 스테로이드 물질인데, 당시 한동안 정력제에서부터 항노화제, 항암제,심지어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1월 7일 프랑스 유력 시사주간지인 '르 포엥'에서 프랑스국립보건연구소 에티엔느 에밀 볼리외 교수팀에 의해 DHEA의 효능이 밝혀졌음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바 있다. 결국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과학기술 보도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학술 논문은 자신의 가설과 그것을 입증하는 결과들(results)로 나타난다. 때문에 이 결과들을 통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논문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비전공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있다. 논문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한채 몇몇 단어를 직역하다보면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지껏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는 항암제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 실험이 생체(in vivo) 실험인지 체외(in vitro) 실험인지, 사람 대상인지 쥐나 토끼의 대상실험인지, 전임상단계의 결과인지 임상 몇 상의 결과인지 등등, 오히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은 다 생략되거나 간단하게 압축하고 '획기적 치료제 개발'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등의 행태는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보도에 있어서는 정확한 사실의 보도와 조심스런 전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대중에게 꼭 과학기술을 알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기술관료(technocrat)'의 시대가 도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 간접적인 영행을 주고 있는 판국에, 사실상 대중들은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분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은 '전문가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대중화'를 통한 과학기술문화의 확립이다.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열린 전문가 집단으로, 소수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작가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쓴다. 비디오를 이용한 미술 작품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의 전자악기가 오케스트라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각 종 통신 수단 광고가 과잉현상을 보이고 있다. 운동과 스포츠는 과학만능주의를 선언한 지 오래다. 예술 문화 부분만 그러한가. 인류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던 인문학도 인문'과학'으로 과학에 스스로 흡수통합되어 버렸다. 사회과학, 교육과학, 생활과학 등등, 이제 '과학'은 모든 학문에 붙는 공통적인 접미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게다가 국가에 경제위기가 닥쳐오니 모두가 과학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어려운 경제위기를 풀기위해서는 외화의 획득이 필요하고 결국 외화획득에는 신기술에 의한 수출 증대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벤처기업 1만개를 육성하고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특혜'까지 주어가며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낱말은 일반인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낱말을 머리로 생각하거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그만큼 대중들과 가깝다는 말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7년을 요약해서 인류 역사책에 한 줄로 적는다면 아마 복제양 '돌리'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조그만 양 한 마리가 사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된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우리귀에 들렸다. 하지만 '돌리'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에 왔던가. 그렇지 않다. 이미 인류는 생식 세포를 이용한 수정란 분할 방법으로 복제 개구리(1952년), 복제 생쥐(1983년), 복제 송아지(1990년)를 만들어낸 전력이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복제 기술의 발달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가. 그리고 어느 날 나타난 어린 양 '돌리'에게 경악하고 또한 박수를 보내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기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문화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의 의식과 과학기술을 연결시켜 주는가. 바로 그것이 글자 그대로 매체(媒體, media)다. 매체를 통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Nature)>지를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리'는 전세계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양이 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대중 매체의 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각 종 대중 매체의 발전을 급속하게 촉진시켰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고대시대의 책에서 언론과 방송으로,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각종 대중 매체의 발달은, 금속활자가 위대한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인쇄기구, 통신 장비등의 발달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이렇게 과학기술에 빚만 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서 과학기술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학술지를 통해 인정받고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런 학술지에 쓰이는 언어는 일반 대중이 쓰는 언어와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때문에 해석이 필요해졌다. 대중 매체가 바로 여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과학기술의 보도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정확한 사실 보도의 부재와 전망의 확대해석으로 인한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이다. 사실보도를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외국 언론의 무분별한 인용보도와 전문학술지를 읽어내는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겠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1년 전만 해도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DHEA(dihydroepiandrosteron)의 경우가 그렇다. 96년 말 <뉴스위크>의 보도를 계기로 갑자기 불어온 DHEA는 남성에서는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으로,여성에서는 에스트로젠(esterogen)으로 바뀌는 전구물질(precursor)로서 몸안을 순환하는 가장 흔한 스테로이드 물질인데, 당시 한동안 정력제에서부터 항노화제, 항암제,심지어 만병통치약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1995년 1월 7일 프랑스 유력 시사주간지인 '르 포엥'에서 프랑스국립보건연구소 에티엔느 에밀 볼리외 교수팀에 의해 DHEA의 효능이 밝혀졌음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바 있다. 결국 한 때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우리 과학기술 보도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학술 논문은 자신의 가설과 그것을 입증하는 결과들(results)로 나타난다. 때문에 이 결과들을 통해 연구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논문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비전공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있다. 논문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생략한채 몇몇 단어를 직역하다보면 엉뚱한 내용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지껏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는 항암제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 실험이 생체(in vivo) 실험인지 체외(in vitro) 실험인지, 사람 대상인지 쥐나 토끼의 대상실험인지, 전임상단계의 결과인지 임상 몇 상의 결과인지 등등, 오히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들은 다 생략되거나 간단하게 압축하고 '획기적 치료제 개발'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등의 행태는 일종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라고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보도에 있어서는 정확한 사실의 보도와 조심스런 전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대중에게 꼭 과학기술을 알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기술관료(technocrat)'의 시대가 도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과학기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 간접적인 영행을 주고 있는 판국에, 사실상 대중들은 아무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전문가만이 다룰 수 있는 분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은 '전문가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과학기술의 비민주성을 극복하는 방안이 바로 '대중화'를 통한 과학기술문화의 확립이다. 배타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열린 전문가 집단으로, 소수를 위한 과학기술에서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728x90
'블로그 주인장 이야기 > 내 思考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바마의 연설과 마틴 루터 킹 (2) | 2008.08.30 |
---|---|
Sicko (식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0) | 2008.07.07 |
엄석대 그 후, 희망은 있는가? (0) | 2006.12.07 |
손봉호 vs 노무현 (0) | 2006.10.13 |
두 얼굴의 교육에 대해... (0) | 2006.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