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11. 16.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다.
위 책은 '문화비평에세이'라고 되어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 비교 에세이'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먼 타국의 망명지에서 말걸기로 시도한 이 책의 출판기념으로 20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가 돌아갈 때 그는 "마음이 살쪘더구만, 필요 이상으로…”라고 짧게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가 당시의 한국 사회랑 타협하지 않고 싸울 때의 그 청년, 그 젊은이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20년이라는 시간과 공백을 그는 메꿀 수 없었던게 아닐까...
프랑스라는 나라. 단 한번도 그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존심이 세다든지, 영화가 재미없다든지, 핵실험을 강행했다든지, 그 들 역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든지, 최근 유행하는 철학한다는 인간들은 그 동네 출신이 많다든지, 뭐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 예전에 문학을 하는 인간들 중에 왜 그리 불문과 출신이 많은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김화영 교수의 문학평론인가 에세이인가를 읽고 프랑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내 기억도 믿을 수 없다) 하여튼 김현이든 최윤이든 몇몇 관련 인물이 있었다고 해도 프랑스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아니, 모국이 아니 그 어느 나라도 내겐 생소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말한 프랑스라고 함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으로 구별되는 자유 우익도 아니고, 소련으로 대변되던 (현실)사회주의도 아니고, 못사는 제 3세계는 더욱 아닌 세계를 뜻한다는 것을.
지은이가 들려주는 프랑스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3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에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며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 사회에 편재하는 토론 문화, 다른 나라에 대한 자신감, 문화에 대한 가치 등등은 참 부럽기 그지 없다. 똘레랑스로 대변되는 그것 말이다. 또한 지은이가 지적하듯이 그 와중에 파생되는 개인주의로 인한 부작용 (예를 들면 외로운 노인문제 따위)도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好/不好)말고 바람직함(善/惡, 아니면 正/邪)의 문제로 읽어보자. 여기서 어느 사회나 문제는 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최악이다. 어쨌든 결국 사회와 개인의 조화의 문제인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개인적인 부분의 삶과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결국 지은이의 말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갖는 이유가 말이다.
얘기가 너무 장황해졌다. 더 간추려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가 그들에겐 가능하고 우리에겐 부족하다는 책망이다. 그 두가지가 같은 개념인지 혹은 다른 개념인지에 대한 논쟁을 걸어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받는 느낌은 好/不好의 문제와 正/邪의 문제를 그들은 적절히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정했다. 인간 개개인에겐 개인주의이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는 면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인, 그들의 정치가 좌우연립정부이듯이, 그런 조화(똘레랑스라고 해도 좋을지 몰라도)가 우리에겐 없다는 것이다. 과거까지, 어쩌면 지금도, 빨갱이나 빨치산이 주요 이슈가 되는 사회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면 또 희망은 없다. 하지만 자꾸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변명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타국에서, 아니 프랑스에서, 그는 20년을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하면 미안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눈으로 타국의 반대말인 자국(自國), 혹은 모국을 바라본다. 체험과 현실의 차는 얼마나 다를까,가 첫번째 나의 의문이다. 그는 20년 동안 바뀐 조국, 어느면에서는 바뀌지 않은 조국,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고한 사람이다. 대부분 언론이라는 일방적 매체에 의해, 그리고 약간의 지인들의 체험담 같은 것으로.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더 풍부한 것! 그 한가지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렇게까지 형편없기만 하지는 않다고, 쪼그맣게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선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 말이 맞아요..."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다.
위 책은 '문화비평에세이'라고 되어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 비교 에세이'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먼 타국의 망명지에서 말걸기로 시도한 이 책의 출판기념으로 20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가 돌아갈 때 그는 "마음이 살쪘더구만, 필요 이상으로…”라고 짧게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가 당시의 한국 사회랑 타협하지 않고 싸울 때의 그 청년, 그 젊은이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20년이라는 시간과 공백을 그는 메꿀 수 없었던게 아닐까...
프랑스라는 나라. 단 한번도 그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존심이 세다든지, 영화가 재미없다든지, 핵실험을 강행했다든지, 그 들 역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든지, 최근 유행하는 철학한다는 인간들은 그 동네 출신이 많다든지, 뭐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 예전에 문학을 하는 인간들 중에 왜 그리 불문과 출신이 많은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김화영 교수의 문학평론인가 에세이인가를 읽고 프랑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내 기억도 믿을 수 없다) 하여튼 김현이든 최윤이든 몇몇 관련 인물이 있었다고 해도 프랑스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아니, 모국이 아니 그 어느 나라도 내겐 생소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말한 프랑스라고 함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으로 구별되는 자유 우익도 아니고, 소련으로 대변되던 (현실)사회주의도 아니고, 못사는 제 3세계는 더욱 아닌 세계를 뜻한다는 것을.
지은이가 들려주는 프랑스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3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에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며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 사회에 편재하는 토론 문화, 다른 나라에 대한 자신감, 문화에 대한 가치 등등은 참 부럽기 그지 없다. 똘레랑스로 대변되는 그것 말이다. 또한 지은이가 지적하듯이 그 와중에 파생되는 개인주의로 인한 부작용 (예를 들면 외로운 노인문제 따위)도 재미(?)있다. 하지만 재미(好/不好)말고 바람직함(善/惡, 아니면 正/邪)의 문제로 읽어보자. 여기서 어느 사회나 문제는 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최악이다. 어쨌든 결국 사회와 개인의 조화의 문제인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개인적인 부분의 삶과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결국 지은이의 말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갖는 이유가 말이다.
얘기가 너무 장황해졌다. 더 간추려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가 그들에겐 가능하고 우리에겐 부족하다는 책망이다. 그 두가지가 같은 개념인지 혹은 다른 개념인지에 대한 논쟁을 걸어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받는 느낌은 好/不好의 문제와 正/邪의 문제를 그들은 적절히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정했다. 인간 개개인에겐 개인주의이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는 면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인, 그들의 정치가 좌우연립정부이듯이, 그런 조화(똘레랑스라고 해도 좋을지 몰라도)가 우리에겐 없다는 것이다. 과거까지, 어쩌면 지금도, 빨갱이나 빨치산이 주요 이슈가 되는 사회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면 또 희망은 없다. 하지만 자꾸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변명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타국에서, 아니 프랑스에서, 그는 20년을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하면 미안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으로 살았다. 그리고 그 눈으로 타국의 반대말인 자국(自國), 혹은 모국을 바라본다. 체험과 현실의 차는 얼마나 다를까,가 첫번째 나의 의문이다. 그는 20년 동안 바뀐 조국, 어느면에서는 바뀌지 않은 조국,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고한 사람이다. 대부분 언론이라는 일방적 매체에 의해, 그리고 약간의 지인들의 체험담 같은 것으로.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더 풍부한 것! 그 한가지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그렇게까지 형편없기만 하지는 않다고, 쪼그맣게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선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 말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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