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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라브 레따)

바이오매니아 1999. 10. 8. 00:00
<러브 레터>(일본 발음으론 '라브 레타')를 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이 있(단)다. "의식의 흐름" 어쩌고 하는, 그 책 설명 다음엔 대부분 제임스 죠이스의 "내 젊은 날의 초상"인가하는 소설이 나오는, 11 권인가  하는 긴 소설. 제임스 죠이스의 그 제목만 멋있는 소설을 읽고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소설을 팽개친 기억이 난다. 어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곤란하지만 일단 그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있다.  "시간"이란 뭔가의 문제는 몇년 전에 한 번 우리 곁을 휩쓸고간 유령이다.  <이다>라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무크지인가에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던, 과학자의 시간, 역사학자의 시간, 현실의 시간, 타임 머신, 내가 사용하는 시간과 남이 사용하는 시간, 그리고 같이 보내는 시간...

이 영화는 그 시간을 찾는 영화다.  과거를 잊은 사람(여자 이츠키)과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히로꼬)의. 그 둘은 동일인(1인 2역)이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여자 이츠끼는 아버지, 히로꼬는 애인)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살아온, 자신과 관계가 있는 남자(남자 이츠키)의 시간을 반추한다. 하지만 이 둘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한명(히로꼬)은 그를 잊고, 다른 한 명(여자 이츠끼)은 그를 찾는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

영화보는 재미로 따지자면 여러번 봐도 좋다.  예를 들어 첫 장면의 여자는 히로꼬일까 여자 이츠끼 일까를 맞춰 본다든지, 1인 2역하는 히로꼬와 이츠끼의 차이점이라든지,  과거 히로꼬 사이코 중학 동창 여학생이 현재 도서관에서 일하는 친구인가, 라든지, 남자 이츠키가 미대생이라는 암시를 찾는다든지, 남자 이츠키 방에 걸린 산의 그림이 그가 죽은 산의 그림인가라든지, 하다 못해 그 심한 간사이 지방 일본 사투리라도. 영화 속에 숨겨놓은 퍼즐을 맞추는 것이 관객들이 영화를 좋아하게 만드는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 퍼즐이 너무 어려우면 예술영화가 되고, 너무 쉬우면 애들 영화가  되고 적당하면 이런 영화가 된다.  

어찌 보면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하이틴 로맨스 -라고는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지만-답다고 할 지도 모르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때문이다.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에게 반납을 부탁한 책.  프루스트는 우리의 자아(自我)란 시간 속에 매몰되면서 해체된다고 믿는(단)다. 때문에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사랑이나 고통에서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단)다(어느 기자가 쓴 그 책의 평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자아를 찾는 영화도 되겠다. 히로꼬는 3년 전에  산에서  조난 당해 죽은 남자 이츠키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함께 조난을 당했던 이츠키 친구의 연인이(되려고 한)다. 어느 날 남자 이츠키의 졸업앨범을 보고 이제는 없어졌다는  그의 집으로 편지를 보냈던 히로꼬에게 이츠키(여자)에게서 답장이 오고, 결국 중학시절 동명이인의 같은반 친구라는 것이 밝혀짐과 동시에  남자 이츠키가 좋아했던 것은 여자 이츠키였고 자신이  여자 이츠키와 얼굴이 꼭같이 생겼기에 남자 이츠키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를 잊는다. 하얀 눈밭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영화는 처음에 히로꼬가 중심이었지만 뒤로 갈 수록 중심은 여자 이츠끼에게 옮겨간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가 기억에 없다. 그냥 이름이 같아서 괴로왔던 같은 반 남학생정도다. 그러나 히로꼬의 편지를 받고 기억을 되살리며 남자 이츠끼가, 사실은 자기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엉뚱하게, 어쩌면 당연하게  내가 계속 이 영화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앎"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여자 이츠끼는 자신은 그 남자 이츠키를 좋아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자  이츠키도 자신을 좋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모른다).  그러다가  점점 남자 이츠키의 괴팍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니 자기를 좋아해서 그랬던 것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알게 된다). 게다가 자신은 전혀 좋아함의 감정이 없었다고(모른다) 영화가 진행되지만 화면에는 여자 이츠키 역시 남자 이츠키에 대한 호감이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예를 들어 달리기 장면, 꽃병을 집어던지는 장면 등).  "앎"과 "모름"의 차이는 뭘까? 하나의 사실(事實과 史實을 합쳐서)과 의미, 그리고 망각.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망각되지 않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지식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을 갖고 있고 어떤 것을 잊었는가, 하는...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 속에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잊어야 하나, 에 대한...

계속되는 삶 속에 남들에 비해 내 "앎"의 짧음으로  가끔 스스로 실망하곤 한다. 스스로를 위로하자면 "아는 척 함"의 짧음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성경에서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안다"(性의 개념까지 포함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그만큼의 의미라는 것이다.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듯하다. 힘들다고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글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소설의 제목에 대한 감상인지도 모르겠다. 엉망이다!  


[덧붙임] 곧 개봉한다는 이 영화를 보고 일본 영화의  저력이라든지 매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일본 영화의 침입 등에 대해 논하게 된다면 그건 오해다. <러브 레터>는 좀 특별한, 또는 특별히 한국사람 입맛에 잘 맞는, 또는 좋은, 일본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진실을 보고 '한국 여자는 모두 미인'이라고 하는 거랑 같다는 얘기.

[더 덧붙임] <퍼즐 찾기> 말고도 좋은, 또는 재미있는 영화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한가지는 뚜렷한 캐릭터다. 이미 '모래시계'에서  확인한 바이지만. 영화에서 버릴 인물이 하나도 없으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영화. 하나의 주제를 향해 모든 인물등이  유기적으로 맛물려 돌아가는... 예전 죠이 수양회 진행부에서 들은 얘기군...이상웅간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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