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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이수진/정신실, 우리학교) -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

바이오매니아 2019. 5. 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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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괘념하신다면 통과해주시길!)


1. 제겐 존경하는 두 명의 선배님이 계십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은 류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거든 OOO에게 가서 물어 보고 의논해 봐라." 전공 지식 이야기가 아니라 복잡한 세상 속에서 판단과 결정의 순간에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는 그 중 한 선배의 아내분께서 쓰신 책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자분은 제가 전에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저를 사로잡고 울렸던 책 <나의 성소 싱크대 앞>을 쓰신 분입니다. 제가 책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한 이유입니다.


2. 이 책을 집어든 또 하나의 이유는 '불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독 집착하는 몇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불안입니다. 한국 사회는 불안이 모든 집단에서 추동력이다, 보수는 북한이 처들어올까봐 안보불안, 진보는 세상이 망할까봐 환경불안, 교육은 학벌불안, 종교는 지옥불안, 보건의료식품업계는 건강불안, 대학은 학령인구불안, 산업계는 경제불안 등등, 불안으로 한국 사회를 끌고 간다, 는 것이 제가 가끔 어디 가서 강연을 하게되면 떠드는 내용입니다. 제가 쓴 책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는 그 불안 중의 최고 불안, 모든 사람들이 걸렸다가 대학을 가고 나면 나은 듯 보였다가 자식이 생기면 다시 반복되는 입시와 교육의 불안에 대해서 다룬 책입니다.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 (이수진/정신실, 우리학교)


3. "꽃다운 친구들"이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1년이라는 방학을 가지면서 인생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청소년들,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에게도 슬쩍 한 번 물어봤다가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쉽지 않은 길이죠. 80년 전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줬던 그 컨베이어 벨트 같은 삶은,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고장이 나지 않고는 말입니다. 이 책은 그 어려움에 도전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4. 보수건 진보건, 아이건 어른이건,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입니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교육입니다. 이건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이익과 불이익이 달려 있습니다. 아니, 자신보다 더 중요한 자식의 이익과 불이익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북유럽, 누구는 미국, 누구는 또 다른 어느 나라의 사례를 가져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야기하지만 결국 선호만 있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 어떤 사회적 문제에 정답이 있겠습니까만 이 교육 문제는 정말 복잡하고 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5. 앞서 <모던 타임즈>의 컨베이어 벨트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고, 차라리 <설국열차>의 예가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친듯이 달리는 열차 속에서 계급 투쟁과 생존권 투쟁이 벌어질 때,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이겁니다. "이 미친 질주에서 벗어나 멈주면 안돼?" 그래서 송강호는 열차를 폭파시키고, 질주는 끝이 납니다. 추워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바깥 세상은 생각보다 춥진 않았고 곰도 살아 있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곰의 밥이 되었을지, 곰을 잡아 먹으며 살아남았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이죠.


6. 이렇듯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는, 조향미 시인의 시와 같은 '탈선'을 한 아이들과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때론 눈물겹고, 때론 기특하고, 때론 아프고, 때론 웃깁니다. 하지만 교육의 목표가 좋은 성적이나 지식 전달이 아니라 성장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조향미 시인의 <탈선> (92쪽)


7.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 <방학이 1년이라고?>는 "꽃다운 친구들(꽃친)"을 시작한 이수진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꽃친이 시작되었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고, 그 속에서 성장한 아이들과 부모들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2부 <방학이 1년이라서!>는 정신실 선생님과 딸 채윤이의 꽃친 체험기이자 성장기입니다. 1부가 양적연구 같은 이야기라면 2부는 질적연구인 셈이지요. 그래서 2부에선 좀 더 깊이 있는 고민과 갈등과 질문과 대답이 있습니다.  


8. 단순히 미친 대한민국 학교제도에서 뛰어내려 1년간 쉬면서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는 안될 이유들이 이 책 속에 많이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힘들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이 값진 것일리는 없죠. 그래서 그 길을 잘 마친 아이들이 참 대견하고 고맙기까지 합니다. 옆에 있으면 용돈이라도 좀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9.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았던 몇 부분을 적어 보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깨우침은 꼭 필요합니다. (24쪽)


아이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데 부모라는 요인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29쪽)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찾는 게 직업보다 먼저 중요한 것 같아. (64쪽)


놀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외로움이다.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중, 76쪽)


부모가 불안을 거스르는 의연함을 기르는 데 1년의 방학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습니다. (96쪽)


여유라는 말의 헬라어 'schole'는 학교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132쪽)


우리 사회에 건강한 어른이 적은 것은 사춘기를 제대로 보낸 사람이 적은 탓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146쪽)


힘겨운 갈등 속에 머무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힘입니다. (163쪽)



10. 간결하게 잘 쓰인 책입니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책 내용이 머릿 속을 쉽게 떠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책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11. 사실 요즘엔 대안학교도 많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갭이어(Gap Year)나 안식년 제도 등을 제도화 하는 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상황의 성숙 없는 서툰 제도화가 문제를 더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길도 있다, 이런 길로 가보자는 뜻을 전한다는 측면에서 꽃친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도권이건 비제도권이건 다양한 교육의 모습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하길 기원해 봅니다. 



* 여담이지만 맨위에 언급한 선배님의 가족이 아빠의 직업을 설명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불평을 자주 했다고 들었는데, 이젠 엄마의 직업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남들이 가지 않은 길(미답지)을 가는 사람들의 숙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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