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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바이오매니아 2001. 10.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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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는 것> by 동물원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
황금빛 물결 속에 부드러운 미풍을 타고서
손에 잡힐 것만 같던 내일을 향해 항해했었지
눈부신 햇살 아래 이름 모를 풀잎들처럼
서로의 투명하던 눈길 속에 만족하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꿈은 소리 없이 깨어져
서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멀어져 갔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사랑이라 말하며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기고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돌아서던 우리
차가운 눈길 속에 홀로서는 것을 배우며
마지막 안녕 이란 말도 없이 떠나갔었지
숨가쁜 생활 속에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무감한 발걸음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우리
시간은 흘러가고 빛바랜 사진만 남아
이제는 소식마저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우 그리움으로 잊혀 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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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많은 영화의 장점은 뭘까. 영화를 보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8월의 크리스마스>가 그랬듯이 <봄날은 간다>도 여백이 많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동물원의 <잊혀지는 것> 생각이 났다. 내 대학교 1학년 시절. 드럼의 한박자 인트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영화와 많이 닮았다. 감독이 변해가는 것을 담고 싶었다고 했던가? 아마 그건 잊혀지는 것과 동의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셈이다.

여백이 많은 영화의 단점은 뭘까. 아마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아니면 제 관중을 만나지 못하면, 재미가 없다느니,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다느니 하는 불평이 터져나오고 만다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어떤이는 재미없다고 '절대' 보지 말라고 했다하고, 어떤이는 '다시는 한국영화 안본다'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품평만 믿고 영화를 놓친다면 당신은 보기 드문 한국영화 수작 한 편을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가 당신은 두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과 한끼 밥값이 넘는 칠천원을 한꺼번에 버렸다고 나를 타박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어떻게 기준을 만들까? 내가 제시하는 기준은 이렇다. 당신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게 보았던가? 그렇다면 빨리 극장으로 향하길(아니라면 <조폭마누라>를 권하는 바이다). 이 영화는 비디오로 볼 영화가 아니다. 가능하면 좋은 극장에 가길 바란다. 특히 음향시설이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 거기서 들려오는 대숲의 흔들림, 산사에 내리는 눈, 시냇물 흐르는 소리... 그것만 듣고 나와도 본전은 했다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미적감각이 거의 없는 내 눈으로 보아도 이 영화는 아름답다.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와 많이 닮았다. 뭐가 닮았냐고? 아름다운 것이 닮았다. 더 이상 자세히는 묻지 마시길. 학창시절 미술이라면 나는 학을 떼었던 인물이다.(물론 전문가들은 다르다고 한다. <비트>, <아름다운 시절>의 현 촬영감독 김형구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맛이 있단다).

하지만 영화가 그게 다가 아닌 것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이미 가르쳐주었다. 수려한 우리네 강산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 영화는 보기 좋은 미술 작품 이상의 감흥을 내게 주진 못했다. 물론 일인 전역의 슈퍼맨 감독의 존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행했던 친구의 눈꺼풀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럼 무엇이 이 영화를 좋게 만든 것일까. 내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감독의 시각이다. 명쾌한 악인이 없다는 것은 일본 '아니메'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만화가 대개 그러하듯, 이 영화가 따스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감독이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래 봐야 군대시절 슬리퍼신고 나갔다가 두들겨 맞았던 한 사람 뿐이라니, 이쯤되면 영화 감독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준이다.

게다가 배우의 연기도 좋다. 키만 크고 멀쑥한 느낌의 유지태는 그야말로 상우이고, 예쁜척한다고 질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이영애는 그야말로 은수다. 이야기도 좋다. 영화를 보면서 악역(?)을 맡은 이영애 욕많이 먹겠군, 생각했지만 영화가 끝난 후엔 오히려 연민이 생긴다. 영화를 보며 은수가 헤어지자는 말을 할 때 모두가 "왜?"라고 질문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입밖으로 내 놓는 순간 너무 유치한 질문이 된다. 물론 해답도 없다. 다만 풍부한 여백을 통해 누구나 한 줌의 이유를 맘속에 가지고 나온다. 게다가 영화에 잔재미를 주는, 그렇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한 소위 '잔가지'(서양 오랑캐말로 디테일)들도 반짝 반짝 빛난다. 그건 각자 찾아보기로 하고....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여러 가지로 이율배반적이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 그러나 헤어진다. 이 영화는 멜로다. 하지만 그냥 멜로가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다 커버린 어른들의 '성장영화'라고나 할까). 두 주인공의 캐스팅은 너무나 상업적이다(소위 스타시스템의 절정이지 않은가? 유지태! 이영애!). 그러나 이 영화는 돈벌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돈 벌려면 이렇게 만들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이 영화는 존재의의가 있다. 한국 영화 극장 점유율 50%를 바라보는 이 때, 이런 영화가 장기 흥행을 한다면 아마 그건 한국 영화의 수준뿐만 아니라 관객의 수준까지 향상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덧붙임] 참고할 것은 작년 아내 임신하고서 JSA를 온가족이 극장에서 본 이후 첫 번째 극장 나들이였다는 점, 따라서 극장 한 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애기 땜에 꼼짝 못하던 사람의 흥분이 이 영화를 보는데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또덧붙임]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추석 연휴기간 동안 <조폭마누라>가 <봄날은 간다>를 눌렀더군. 음... 역시 대단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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