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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의 이웅평 귀순 사건과 기억의 왜곡

바이오매니아 2022. 8. 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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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 속 황정민씨가 연기한 이웅평 귀순 사건이 화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웅평씨가 귀순 할 때 난리가 났었다, 사이렌 울리고 방송에서 실제 상황이라고 그랬다, 전쟁나는 줄 알았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제 본 <방구석 1열 특별판>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들은 영화 팟캐스트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일종의 집단적 기억 왜곡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왜 우리는 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아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은 저도 수십년간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이웅평 귀순에 사재기에 나섰다구요???

영화 <헌트>의 배경이 되는 1983년은 비행기 관련 큰 사건사고가 네 건이나 있었습니다. 

 

1) 1983년 2월 25일의 이웅평 귀순사건(미그19) 

2) 1983년 5월 5일의 중공민항기불시착 사건(중공민항기납치사건)

3) 1983년 8월 7일의 중공기(미그21) 귀순사건 

4) 1983년 9월 1일의 소련의 칼기 격추사건

 

그런데 우리는 1)번의 이웅평 귀순 사건을 2)번 비행기 납치 사건이나 3)번의 중공기 귀순사건과 헷갈리는 겁니다. 아마 주로 3번일 겁니다. 왜냐하면 2번은 민항기였으니까요. 게다가 이웅평 귀순은 휴일이 아니라 금요일이었고 야구를 하는 시즌도 아니었고 오전이었습니다. 

2월은 야구 시즌이 아닙니다!

이웅평 대위는 2월 25일 금요일 오전 10시 반 넘어 귀순했는데, 당시엔 TV방송이 오전 10시까지만 하고 오후 5시인가에 재개했죠. 그래서 TV 방송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민방위 사이렌은 울렸다지만 사람들은 별로 반응이 없었죠. 그래서 오히려 우리나라 비상체계와 무감각을 비판하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웅평 대위 귀순 사건은 이후에 언론에서 크게 다뤄져서 우리에게 강한 각인이 되어 있지만 실제로 넘어오는 순간에는 다들 뭔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1983년 3월 1일 조선일보

이렇게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바로 5월 5일 어린이날에 중공 민항기가 하이재킹 당해서 춘천에 착륙합니다. 이 때는 어린이날이어서 휴일이었는데 민방공 사이렌이 울리긴 했지만 방송에선 특별 방송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놀랐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는 수준이었다고 하지요. 일단 민항기여서 폭격의 위험 같은 것은 없었고 내려 온 곳도 서울 쪽이 아니라 춘천이어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때도 방송에서 즉각적으로 대응을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 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24시간 하도록 법을 바꿨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봤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경향신문 5월 6일자

 

자, 이렇게 연타석으로 뒤통수를 맞았는데 8월에 드디어 온국민이 기억하는 그 사건, 중공기 귀순사건(손천근 귀순 사건)이 터집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일요일 오후, 그것도 여름 휴가철 일요일에 일어났는데 앞서 긴급사태 때 방송들은 뭐하는 거냐, 라는 비판을 들었기 때문에 방송들이 일제히 나서서 긴급상황입니다, 실제상황입니다, 라고 외쳤고 국민들이 화들짝 놀라서 난리가 났었죠.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건 이 사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수영장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탈의실이 아닌 수영장에서 전부 같이 옷을 갈아 입고 난리가 났었다는...)

경향신문 1983년 8월 8일자

실제로 앞선 두 번의 사건에서는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이 중공기 귀순 사건 때 처음으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고 하는 기사도 있습니다. 아무튼 온국민이 난리가 난 것은 이 때였고, 방송과 민방위 본부에서는 나름 두 번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배워서 잘(?) 대응한 사건이었죠.

 

그리고 바로 9월 1일에 비극적인 KAL 007 피격사전이 일어나는데... 이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 우리가 체감을 할 수는 없었고 다음 날 뉴스로만 알게 되었죠. 그리고 그 다음이 10월 9일에 있었던 아웅산폭탄테러... 그리고보면 1983년은 계속 놀라는 일이 많았던 한 해였네요.ㅠㅠ

 

그런데, 너는 왜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냐고 생각하신다면... 실은 작년에 제가 인간의 기억력을 회의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단 말이죠.

 

중학시절 여름, 친척들과 난생 처음 설악산에 놀러 갔을 때 하필이면 신흥사 승려 살인사건이 나서 설악산 구경도 못했고, 게다가 몸이 아파 엄청 힘들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적기출현으로 실제상황이라며 차 막히고 난리가 났었던 기억이 잊히질 않고 생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그 적기출현이 이웅평 귀순 사건으로 40년 가까이 알고 있었거든요. 

 

설악산 신흥사 승려 살인 사건 기사

 

작년 여름에도 누군가에게 백만스물한 번째 그 해 여름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듣고 이웅평이 누구야 하며 인터넷 검색을 한 분이 그 사건은 2월인데요? 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죠. 그럼 내가 기억한 그 사건은 무엇이었던 걸까, 옛 신문을 뒤져보니 중공군 미그 21기가 귀순한 사건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말고도 이렇게 기억이 잘못된 분들이 많을 줄이야. 그게 TV에까지 나오고...ㅎㅎㅎ

 

아무튼 인간의 기억이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하지도 말구요. 이상으로 영화 <헌ㅌ>와 하등 쓸데 없는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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