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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 창비)

바이오매니아 2022. 12. 2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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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마지막 책을 읽었습니다. 백수린 작가님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입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2020년의 첫 책으로 백수린 작가님의 짧은 소설집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를 읽었고, 2021년의 첫 책으로는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었더군요. 2022년 벽두엔 아니었지만 마지막엔 또 이 책을 읽었으니 뭔가 한 해의 끝과 시작에 함께하는 작가님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해의 시작과 끝에 읽었던 백수린 작가님의 책들

작년 벽두에 읽었던 <다정한 매일매일>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책 리스트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번 책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도 그 리스트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느끼며 읽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은 백수린 작가님이 최근 이사한 "언덕 위의 집"에서의 삶과 사랑하는 반려견 "봉봉이"를 통해 배운 사랑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언덕 위의 집이라고 해서 해운대 달맞이 고개 위의 근사한 카페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봉봉이라고 해서 <인사이드 아웃>의 그 봉봉이도 아니구요. 언덕 위의 집은 택시 기사도 잘 모르는 서울 어딘가 (아마도 창신동 근처?) 산동네 오래된 주택이고 봉봉이는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노령 반려견입니다. 

 

사람은 때로 자기랑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살았구나, 공감을 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서 받은 느낌은 바로 그런 호감과 공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저의 정체성에서 삼양동이란 공간이 차지한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아실겁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쓴 삼양동 정육점이라는 글을 보통 제 소개로 사용하곤 하지요. 이 블로그의 첫 글도 삼양동 정육점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삼양동이 잠깐이라도 언급된 작품들, 예를 들면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조세희의 <뫼비우스의 띠 (난쏘공 속 첫 단편)>, 이청준의 <낮은데로 임하소서>, 신경림의 "산동네-삼양동에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 <도시로 간 처녀>, 심지어 TV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같은 리스트를 모으기도 하구요. 물론 저는 연탁과 장작을 땠고, 눈이 오면 연탄 리어카를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밀고 올라갔다가 타고 내려 오고, 지금은 차 한 대 댈 곳이 없는 그곳을 탈출(?)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 책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은  어쩌면 우리 골목에 살았던 이웃을 만난 것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좋은 이웃을 말이죠. 

 

한 동네에서 기본으로 50년은 사시는 분들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중)

그리고 이 책은 많은 곳에서 낯익은 장면과 새로운 시각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생의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각각의 것들이 자라나면 자라나는 대로 그냥 두고 보는"(46쪽) 원예 방식은 여름철마다 밀림이 되어버리는 저희집 마당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우리 동네가 재개발된다고 그러던데 쫓겨나면 어쩌지?"(89쪽) 걱정하는 이웃은 작년에 신속 재개발 주민 동의 30%를 채우지 못해서 재개발이 무산되었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주며, "지하철역 출구 계단 위에서 살구를 파는 노인" (191쪽)에게서는 여름이면 마당의 살구를 들고 나가 시장통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팔아서 푼돈을 벌었다고 좋아하시는 제 어머님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자라나는 대로 그냥 두어 여름이면 밀림이 되는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무가 감당하기 어렵게 많이 열리는 살구나무)

하지만 이 책이 제게 준 행복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이 아니고 작가님이 갖고 있는 마음들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한마디로 사려깊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자가 되긴 글렀다고 말하지만 더 가난한 사람 앞에서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어떤 꿀에서 채집했건 꿀은 거의 대부분이 설탕과 포도당과 과당과 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저와 달리 그 차이를 느끼고 볼 수 있는 마음, 완벽이라는 말의 폭력성을 간파해내는 마음, 매일 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 흐르는 마음, 하찮고 오래된 물건을 보고 시간을 견뎠다는 것만으로 존중할 수 있는 마음, 무시무시한 동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가 이웃들과 친숙해져서 두려움을 없애겠다는 마음, 깊숙히 박혀 있는 혐오의 말일지라도 섣부르게 단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언덕 위의 집"과 그 동네를 다소 낭만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느끼는 마음 한편의 죄책감까지! 

 

아주 많은 사람이 마음에 칼을 하나씩 품고 날을 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에, 사려 깊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씩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조곤조곤 설득을 당한 느낌, 그게 이 행복의 정체가 아닌가 싶네요. 여러분에게 이 책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매우 매우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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