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기분이 좀 꿀꿀해서 밤에 혼자 회사 건물에 있는 극장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 상영 중인 <트위스터스>, <행복의 나라>. <빅토리> 중에 고민하다 가장 상영관이 적은 <빅토리>로 결정을 했는데 그 이유는 저 3편의 영화 중에 아내에게 나랑 같이 극장에서 보지 않을 영화 골라달라고 했는데 무슨 영화인지 몰라서 아내가 고른 것이 빅토리였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큰 만족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첫 감상은 뭐 엄청 잘 만들었거나, 이야기가 새롭고 탄탄하거나 대단한 영화적 성취가 있는 영화는 아닌데, 이상하게 뭔가 내 삶에 응원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 영화를 응원하고 싶어지더군요. 여성 서사와 지방학생 서사와 언더독 서사 등등이 섞여 있는데 예전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 생각이 특히 많이 났습니다. 아마도 요즘 구글이 보여주는 옛사진들이 과거 실험실 아이들과 방학 때 샘플링 여행 다니던 것들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 (부디 다들 잘 살고 있기를.)
생각보다 영화가 좋아서 아내와 함께 한 번 더 보기로 했는데, 저희 동네에 무대인사가 있다고 해서 배우분들도 함께 만날 수 있었네요. 영화 속 응원부 "밀레니엄 걸스" 9명이 완전체로 다 인사를 다니던데,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무 사이가 좋고 즐거워보여서 더 흥겨웠습니다. 게다가 첫번째 봤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태권소녀 상미역의 염지영 배우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까지!!!
<빅토리>에는 벡델 테스트 통과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여성배우들이 나오지만 가장 눈에 띄었던 새로운 발견은 태권소녀로 나온 배우 염지영님. 인터뷰를 보니까 태권도 3단이고 축구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선수 꿈을 포기했다고 하시더군요. 안타깝지만 이제 배우로 대성하실 것 같습니다. TV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도 해보고 싶다고 하시던데 곧 TV에서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회차 관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캐릭터는 미나반점의 7자매 K-장녀 장미나였습니다. 항상 주인공 옆의 2인자이지만 네 덕분에 조연이라도 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주인공을 응원해주고, 모두에게 틈만 나면 밥 챙겨 먹이고, 끝까지 희망적인 캐릭터가 매우 사랑스럽군요. 장미나를 연기한 박세완 배우는 이미 <육사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준 바 있지만, 부산 출신이라서 그런지 연기도 자연스럽고, 매우 훌륭했다는 생각입니다. (왜 전 항상 주인공보다 그 옆사람에 관심이 가는지...ㅎㅎ)
그리고 영화를 두 번째 보고 깨달은 점인데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조연들은 아무래도 소외될 수 밖에 없는데, 최대한 배려를 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중요한 순간에 9명의 모든 배우들 하나 하나 비춰주면서 골고루 시선을 주더군요. (오히려 혼자 멋진 폼 잡는 축구부 스트라이커가 흐지부지 사라지다니...ㅎㅎ)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살아 있고 인상적이어서 아마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을 더 자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빅토리의 미덕은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응원받는다는 느낌도 그 이유가 아닐까 싶구요. 영화의 표면적 주제인 여성 서사와 지방 서사 이외에도, 파업하는 조선소 노동자를 응원하고, 심지어 서울에서 온 스트라이커 주인공과 조선소 직원이 되고픈 실력 없는 골키퍼 중에 골키퍼에게 더 애정을 주고, 아이돌보다 백댄서에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마냥 희망적이어서 어찌보면 현실감은 좀 떨어지지만 이런 정통 대중 영화도 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제가 올해 요르고스 란티모스니 PTA 등의 "쎈 영화"를 많이 봐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필선(이혜리)이 아버지(현봉식)과 마주하는 장면들이 참 좋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하지 마라"씬, 딸이 먹다 남긴 총각김치를 아빠가 먹는 씬, "니는 세상이 그리 만만하나?" "아빠는 세상이 그리 무섭나?"라고 말하는 운동장 씬, 그리고 필선이 돌아와서 조용히 밥 먹으며 아빠가 "다 좋았다"고 말하는 장면 모두, 웃음과 눈물을 짓게 만들더군요.
솔직히 무한도전류에서 다시 유행시킨 90년대 댄스곡들을 (그 당시엔) 엄청 싫어했던 아재 입장에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건 다 기우였구요. 다만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한 걱정은 비경남 사람들이 사투리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네요(그리고 경남인들은 사투리가 어색하다고 뭐라 카겠지 싶은...ㅋㅋ) 물론 아트하우스 영화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보기엔 헛점이 많이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개봉관이 너무 적어서 많이 아쉬운데, 화끈하게 역주행 한 번 해주기를 저도 응원해봅니다.
덧붙임 하나. 그런데 엄마는 왜 한 명도 나오지 않을까요. 세번째 본다면 마지막 캐스트 크레딧을 유심히 보고 싶네요. 편집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는지.
덧붙임 둘. 사실 빅토리를 알게 된 것은 이혜리 배우가 혼자서 트위터에서 열심히 홍보를 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주연한 영화에 대한 책임감에 감동을 받았고, 연기와 춤은 말해 뭐할까 싶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덧붙임 셋.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응답하라 시리즈, 땐뽀걸즈, 무빙을 본 적이 없어서, 그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느끼는 기시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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