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묵혀두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씨네필이나 평론가들의 평은 좋은데 엄청 재미있을 것 같진 않고, 뭔가 좀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봐야 하는 영화들이죠. 최근 <퍼펙트 데이즈>가 화제인데, 상영하는 곳도 별로 없고 시간도 맞추기 힘들어 약간 꿩 대신 닭이라는 느낌으로 <패터슨>을 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코로나의 재방문으로 약간 쉴틈이 생긴 까닭이기도 하구요.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착 가라앉은데다, 평론가들의 상찬 덕분에 기대감을 낮춰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소해 보이는 인생을 예술로 만드는 좋은 영화였네요. 마지막 어느 장면에선 잠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세상 누군가에겐 등단해야 시인이고, 좋은(?) 저널에 논문 써야 과학자고, 메달 따야 운동 선수고, 국전 입선해야 미술가이고, 콩쿨 입상해야 음악가이겠지만, 그런 자격 조건이 없이 "텅 빈 페이지" 하나만 가져도 누구나 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인정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Sometimes an empty page presents most possibilities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운전기사입니다. 정해진 노선을 시간 맞춰 달리듯이 그의 삶도 매일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알람도 없이 기상해서, 시리얼로 밥 먹고, 걸어서 출근하고, 운전하고, 시 쓰며 점심 먹고, 운전하고, 걸어서 퇴근하고, 저녁 먹고, 강아지 산책 시키고, 바에 들려 맥주 한 잔 하는 매일 같은 일정의 하루이지만 어제와 같은 날은 하루도 없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의 시가 됩니다.
저는 답답하게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답답하게 반복적인 실험은 엄청 많이 해봤지만요. 예전엔 이쑤시개로 대장균 하나씩 수만 개 콜로니를 찍어보기도 했지만, 주로 제 스케줄이 아니라 항상 미생물 스케줄에 맞춰서 살았기에 출퇴근이 정해진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반복적인 일상도, 뭔가를 불규칙하게 좇는 일상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패터슨>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어떤 분이 "지구에서 만난 같은 행성 사람들의 암호 같은 대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하, 그거였구나 싶어서 무릎을 쳤습니다. 최근 뭔가 심정적으로 좀 침체된 느낌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적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 일상을 마법처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 "아~하"의 순간에 있는데 말이죠. 그런 순간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가까이 두고, 자주 만나며 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Trivia 1. <패터슨> 영화 속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지만, 버스 승객으로 나왔던 커플이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 소년소녀 커플이었다는 사소한 이야기가 매우 반가웠네요.
Trivia 2. 영화 보기 전에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씨의 이야기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패터슨이 뉴저지에 있는지는 모르고 시골 동네 버스 운전사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뉴욕 바로 근처의 동네이고 인구도 NJ에서 두세번째로 많은 도시라는군요. 어쩐지 영화에서 패터슨 출신 유명인사들 이야기가 계속 나오더라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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